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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왔다.문화시민 2023. 10. 27. 02:32
2023년 10월 25일 0.
현재 상영 중인 영화다 보니 스포일러 주의.
1.
미야자키 하야오의 복귀작, 어쩌면 또 다른 은퇴작, 그리고 문제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강성 지지자를 자청하는 나는 이 영화를 감독의 복귀 소식이 들려왔을 때부터 애타게 기다려 왔다. 그리고 마침내 개봉일이 찾아왔구나. 이 영화만큼은 꼭 개봉일에 보고 싶었다. 심지어 개봉일이 때마침 문화가 있는 날이라고 영화 할인까지 해주더라. 하필 이 날 꽤 힘든 일과를 보냈고, 또 평소에 금방 퍼져버리는 저질 체력의 보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무조건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영화관에 갔다. 영화는 너무 좋았지만, 덕분에 해소되지 못한 피로는 잔뜩 쌓여버렸고, 돌아와 생각을 정리해 보려 용쓰는데 머리가 엄청나게 지끈거리더라. 영화를 감상한 날에 바로 이 글을 다 써서 업로드하고 싶었지만 결국 키워드들만 던져 놓고 완성은 뒤로 미루게 되었다.
그렇게 다음날 목요일이 되었고, 내 노트북은 가사상태에 빠져버렸다. 갑자기? 아무튼 여기에다가 다 적기엔 너무 자질구레한 수많은 일들을 겪고 현재 시간 10월 27일 새벽 1시 20분. 다시 글을 마무리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냥 좀 머리 아픈 일들이 많았다는 것을 특별히 언급해두고 싶었다.
2.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국내 개봉일은 10월 25일이다. 그리고 일본 개봉일은 7월 14일이다. 계절이 바뀔 만한 시간이 지나서야 한국에 공개되었다는 말. 지브리의 할아버지들에게 무슨 바람이 든건지 이런 요상한 마케팅 전략을 취해서... 아무튼 덕분에 일본 현지 반응을 충분히 습득한 다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때의 반응을 짧게 요약하자면, 난해한 영화. 감독조차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영화. 영화에 크게 관심 없어 보이는 주변인들도 이런 극심한 호불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더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때 당시를 논평해 보자면, "야 이 영화 망했대!"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들이 좀 많아 보이긴 했다.
3.
앞선 글들을 몇 개 읽어보면 알겠지만 극장에 가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말했듯이 이번에도 다녀온 후 두통으로 엄청 고생했고. 하지만 이번엔 일부러 주변인들에게 혼자 볼거라는 어필을 해가면서까지 극장에 혼자 찾아가 영화를 봤다. 반응도 대충 예상되고, 그런 반응에 일일이 대응하며 내 감상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4.
잠시 번외로 어려운 영화에 대해, 나는 어려운 영화라는 개념 자체를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애초에 영화에 난이도를 두는 것 자체가 답을 찾으려는 경향에 의한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소설 《소나기》의 "보랏빛" 구절이나 히치콕의 손녀 일화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비평을 비판하는 레퍼토리로 흔히 인용되는 두 사례인데, 나는 그 인용이 그저 또 다른 "정답"을 제시하려는 수준에 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평소에 자주 한다. 아무튼 주변에서 그 영화 엄청 어렵다고 하던데라고 말하면 나는 그냥 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혹은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
5.
아무튼 영화 이야기를 하자. 바로 위에서 저렇게 말했지만 어렵다는 이야기는 십분 이해가 됩니다. 공백이 상당히 많은 영화였다. 장면의 호흡이 아주 길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장면들도 여럿 있고, 이세계가 나오지만 그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는 영화였다. 간단히 말해 불친절한 영화. 지브리 하면 생각나는 난리법석이 느껴지는 작화와 움직임은 여전히 동작하긴 하지만 그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즉, 티켓 판매량이 많이 나올 영화는 아니라는 말.
6.
나는 했던 이야기 또 하는걸 아주 싫어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제의식은 여러 작품에 걸쳐 공유하는 바가 있다. 자연, 인간, 반전, 낭만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볼 땐 같은 주제를 사용할 뿐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왔다. 메시지를 가장 잘 담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트뤼포가 했다는 말이 있잖아, 메시지를 담고 싶으면 우체국에 가라던가. 그 말도 가끔씩 오용되어 영화에 메시지를 담는 것 자체가 감점사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7.
미야자키 하야오는 같은 주제를 써도 항상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야기가 항상 진보한다. 그리고 이게 가장 큰 지점인데, 영화를 발표 순서대로 안 봐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 애초에 생각이 깊고 다방면으로 발산하고 있다는 거지. 이번 영화에선 그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등에 짊어진 다음 또 한 발 더 나아간 느낌을 받았다.
8.
영화 전반에 우울함이 깔려 있다. 전작 《바람이 분다》에서도 이런 우울함은 없었던 것 같다. 거기선 주인공 머리가 꽃밭에 가있었거든. 주인공의 모습이 여태껏 미야자키 감독의 영화에선 본 적 없는 묘사였던 것 같다.
9.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마케팅이나 인터뷰가 그랬지만 영화 스스로도 그렇다.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람이 분다》와 함께 2부작으로 쓴 유서처럼 느껴진다.
10.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신비주의 마케팅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이 든다. 양가적인 감정이 아니었을까. 꼭 하고싶었던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쉬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런 감정이 아니었을까.
11.
감독의 그 위치, 거장, 은퇴를 몇 번이나 번복한 80살의 거장, 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앞서 《바람이 분다》에서 자신의 모순에 대한 변명은 실컷 남겼다. 이제는 그것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그저 숨김없이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 모순과 필멸을 문신처럼 새긴 채 태어난 존재라는 것, 그 막바지에 다다라 스러지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영화였다.
12.
그래서 제목 선택이 아주 좋았던 것 같다.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이 담긴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인데,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제목이 주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제목만 놓고 봤을 땐 워낙 꼰대스러움이 느껴지는 문장이라 온갖 농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13.
하지만 그렇게 주제를 던지는 틈에 이야기가 무너지면 안된다. 그게 그 우체국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렵다는 말을 미리 듣고 와서 모든 장면의 의미를 찾는 것에만 집중하다 눈앞의 쉬운 줄거리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구조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감독의 여느 작품들과 다를 바 없이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극장에서 내 옆자리의 관객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나도 조금 울컥했었고.
14.
여기서 또 호불호를 증명하는 일화, 나오자마자 "무슨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같은 시간 같은 상영관의 관객들에게서 바로 체감해 버린 호불호.
15.
앞서 공백이 많은 영화라고 했다. 영화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저렇게 말하긴 했지만 진짜 영화 보는 동안 오디오가 엄청 빈다. 목 가다듬는 소리, 과자 먹는 소리, 다리 꼬는 동안 바지의 천이 서로 비벼지며 내는 소리 다 들리더라. 영화에 잔뜩 몰입한 관객(아까 눈물 닦던 그 사람)이 왜가리보고 혼잣말로 욕하는 것도 다 들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16.
나는 봤던 영화는 웬만큼 오래되지 않은 이상 다시 안 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나중에 다시 집에서 보고 싶긴 하다. 영화가 좋았던 것도 있지만, 환경적인 영향 때문에...
17.
아무튼 신작 소식이 들려올 때부터 현실적으로 이게 은퇴작이라고 생각해 오고는 있었는데, 감독 본인이 다시 창작욕을 불태우고 있긴 한 것 같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다시 스튜디오에 출근하며 차기작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고 하더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앞으로 더 나온다면 나는 너무나도 행복할 뿐...
18.
끝으로, 호불호를 넘어 이 영화를 혐오하는 반응들도 많아 보인다. 대부분 《바람이 분다》에서 이어지는 반응들인 것 같다. 나는 다만 그 시선이 되려 너무 전체주의적인 것은 아닌가 싶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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