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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몽 하몽>을 보고 든 생각일요감상회 2024. 12. 8. 14:46
비가스 루나, 1992
1.
정말 다사다난한 한 주였다. 12월 3일 화요일 밤 터진 뉴스에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고, 그 영향 때문인지 일상에서 스스로 크게 자책할 만한 실수도 하나 저질러 버렸다. 사실 저지른 일이 너무 어이없고 멍청했기에 그 영향 때문이라는 건 좀 핑계 같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나보다 더 심한 정신 나간 짓을 저질렀는데 얼른 물러날 것이지 오늘 오전 영화 한 편 보고 오는 사이에 나온 뉴스를 보니 또 뭘 그리 질척거리는지 참. 구제불능의 트롤러 하나 말고도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할 만한 인간들 백수십 명이나 모여 있을 건데.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일까. 공교롭게도 지난주에 보려고 골라놨던 오늘의 영화 <하몽 하몽>은 그렇게 지독한 욕망에 사로잡혀버린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강제연결 좋았어.
2.
전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다뤘을 때에도 말한 내용인데, 나한텐 가끔씩 뜬금없이 특정 국가에 대해서 관심이 폭발하는 시기가 찾아오곤 한다. 이번에 대상이 된 나라는 바로 스페인. 벌써 버킷 리스트에는 "발렌시아식 빠에야 만들어 먹기"가 추가되어 있을 지경이다. 여기에 왜 꽂힌건진 나도 모르겠네. 아무튼,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해 배우고 싶다면 그 나라의 영화를 보란 말도 있잖아?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다. 이름부터 "나 스페인 영화예요"라고 말하고 있는 <하몽 하몽>이 지금 딱 어울릴 영화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영화에도 그 발렌시아식으로 보이는 빠에야가 잠깐 나오고 말이야.
갑자기 빠에야 이야기 하니까 생각나서 쓰던 글을 멈추고 잠시 이 영상 틀어놓고 10분 정도 딴짓좀 했다.
3.아무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넘어와서, <하몽 하몽>을 선택한 이유에는 사실 다른 요인도 있었다. 바로 스페인 대표 배우 둘의 커리어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에르 바르뎀, 둘은 심지어 부부 사이이기도 하다. 이 영화로 연이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둘이 동시에 세계적으로 조명받았고, 둘 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다음 나중에 한 영화에서 다시 상대역으로 만나 연인이 되었다는 신기하고 로맨틱한 백스토리. 페넬로페 크루즈의 출연작은 많이 본 것 같진 않지만 하비에르 바르뎀은 나오는 영화마다 너무 좋아했던 배우라서 더 관심이 가는 이야기였다.
4.
그리고 영화는, 동물의 왕국 그 자체였어. 줄거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서로 누구든 언제든지 몸을 섞을 수 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바로 떠오르질 않더라. 아니 지난주에 이어 연달아 이렇게 야한 영화만 봐서 되겠어 이거? 다음 주엔 디즈니 영화를 봐야 하나.
5.
그런 점에서 상당한 호불호를 이끌어낼 만한 영화였다. 단순히 섹스를 많이 한다를 넘어서, 등장인물들의 행적은 범인의 시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거든. 초반에 남자친구 없이는 죽을 거라던 주인공이 얼마나 됐다고 스패니시 100% 마초 상남자한테 넘어가서 이번엔 이 남자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도 죽을 거라는 말을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막장 드라마 줄거리. 남자친구는 주인공의 엄마와... 스패니시 마초는 남자친구의 엄마와... 아니 거기서 남자친구 아빠는 왜...
6.
그렇게 내 기준 불호에 가까운 별점을 누르고 점심을 먹고 온 후. 생각이 좀 정리된 나는 다시 점수를 올렸다. 결국 이 영화가 그런 난장판을 옹호한다거나, 유흥거리로만 삼은 영화는 아니었다고 느껴졌거든. 사실 조금은 유흥거리처럼 다룬 것 같긴 했는데 아무튼.
7.
욕망에 사로잡혀 비극으로 빠지는 이야기는 많다. 그런 주제로 좋은 작품 찾아보면 많을걸. 당장 지난주에 봤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만 해도 돈에 대한 욕심에 사람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잖아. <하몽 하몽>은 그 욕망이라는 주제에 "스페인"이라는 정체성을 담은 듯했다. 개인적으론 국민성이란 표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곤 하지만,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정열적인 이미지, 마초적인 이미지는 흔히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8.
이 영화는 그것을 확대하고, 과장하고, 비틀어서 우리 앞에다가 내놓았다. 왓챠에 이런 좋은 코멘트가 있더라고.애정보다도 욕망에 좌우되는 인간군상들을 한 데 모아놓으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가축떼랑 다를 바가 없음을 보여주는 엔딩씬.
그래 앞서 나도 동물의 왕국이라고 표현했었지. 정열과 마초라는 단어로 포장된 욕망에 대한 과도한 추종에 대해 비판하는 듯한 영화였다. 그래서 예전에도 한 번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가끔씩 이렇게 본인이 소속된 국가에 대해 가지는 콤플렉스가 표출되는 듯한 영화가 있더라고. 물론 이렇다고 막 스페인은 못 돼먹은 나라! 이런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는 게 중요하단 말이지. 나도 스스로 우리나라가 너무 좋은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거랑 우리나라는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건 다른 이야기니까. 그리고 <하몽 하몽> 보고 나서도 스페인은 여전히 내 맘 속에서 계속 관심이 가는 나라로 남아있을 것이다. 아니 이번 영화 봤기 때문에 더 그럴걸.
9.
아무튼 다시 스페인에 대한 딴소리. 빠에야와 하몽 포함해 스페인 음식을 좀 다양하게 접해보고 싶은데, 이탈리아 음식에 비해 대중화가 덜 되어있어서 아쉽다. 해봤자 이탈리아 음식 파는 곳에서 곁다리로 취급하는 감바스 정도. 찾아보면 갈 곳이야 있지만, 너무 비싸... 요즘엔 제대로 된 파스타도 만원 초반대 ~ 몇천 원에 파는 곳이 많은데, 스페인 식당은 대부분 고급화된 느낌의 왠지 와인 한잔도 같이 주문해야 할 것 같은 그런 가게들. 빠에야 혼밥 가게, 이런 곳 어디 없나. 게다가 그나마 파는 빠에야들도 다 해물 들어간 버전이더라고. 난 저 발렌시아식, 토끼고기 들어가는 빠에야를 먹어보고 싶은데. 물론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별종 취급받는 시선이 느껴지긴 하더라.인상 깊었던 장면
영화 제목 <하몽 하몽>은 한 여자를 둔 두 남자의 최후의 하몽 결투를 뜻하는 것이었나. 그냥 스페인식 절인 햄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하몽, 영화에서 보니 정말 사람 하나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흉악하게 생기긴 했더라. 건조 숙성으로 만드는 거면 딱딱하기도 엄청 딱딱할 거 아니야. 아무튼 이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 깊었다. 둘의 처절한 결투도 그렇지만 엔딩을 장식하는 저 구도가 앞으로도 기억에 남을 듯.'일요감상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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