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키 17>을 보고 왔다.문화시민 2025. 3. 2. 16:14
2025년 3월 2일 0.
현재 상영 중인 영화다 보니 스포일러 주의.
1.
개인적으로 지난 2010년대 최고의 PVP 게임은 <오버워치>, 최고의 싱글플레이 게임은 <몬스터 헌터: 월드>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몬스터 헌터 와일즈>가 나온 이번 연휴 영화 감상을 포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으나, 오늘의 영화 일정은 홀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다녀와 버렸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내가 잡은 약속이긴 한데. 아무튼, 그런 이유로 무려 그 봉준호의 <미키 17>을 안 볼 수는 없지. 이틀 전에 사랑니도 뽑았고 오늘은 오랜만에 추적추적 비도 내리는 데다가 약속 장소가 그리 가깝지 않다는 삼중고를 견뎌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
2.그나저나 결국 한 달 동안 영화관 3회 출석을 찍어 버렸군. 오늘도 여러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았지. 영화 상영 내내 진동을 울리며 화면을 반짝이는 옆자리 관객의 스마트폰, 영화 도중 갑자기 스크린을 침범하는 이동하는 사람의 그림자, 등받이로 전해지는 뒷사람의 발길질 등등.
3.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찬 상영관이 말해주듯이 최근 한국 (감독 작품) 영화 중 이 정도의 기대를 받은 영화는 없는 것 같다. 박찬욱 신작은 아직 소식이 좀 부족하니까. 원래도 우리나라의 대표 감독 중 하나였는데 전작 <기생충>이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니. 그만큼 기대가 너무 컸나 찾아보면 좀 밋밋해하는 평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꽤 좋았다. 정말 좋았다. 의외로 내가 알게 모르게 거리감을 두고 있었던 봉준호의 세계관에 개인적으로 한 발 더 가까워진 느낌.
4.
같이 보러 간 친구도 영화를 보고 나서 <옥자>가 떠오르는 영화라고 평하더라(정작 당시 <옥자>보러 가자고 했을 때 당일 캔슬했던 녀석이). <옥자> 뿐만이 아니라 감독의 전작들 향기가 여기저기 물씬 담겨있다. 개인적으로 한 씬에선 <살인의 추억>도 떠올랐다. 이것이 왜 인상 깊었냐면, 마치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좋아하는 이유처럼, 각 한 편의 영화들 모두에 감독의 작품 세계가 담겨있다는 느낌이 드는 게 좋거든. 이번엔 이 재담꾼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나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5.
사람들이 밋밋해 하는 반응도 이해가 되고, 내가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도 함께 이해가 된다.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들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끝이 찝찝하다. 영화적인 충격과 그 끝의 잔향을 정말 잘 다루는 감독이다. 이번 영화는 그렇지 않다. 해피 엔딩이고, 후련하게 끝난다. 이런 경우 흔히들 할리우드가 또 유능한 감독에게 재갈을 물린다고 거부감을 표하는 반응들이 많아지기 마련이지만, 다행히 이 영화는 그 결말의 목소리가 봉준호 그 자신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봉준호 감독 본인에게 비평의 방향이 제대로 향하고 있긴 하지. 나는 그 목소리가 참 좋았다고 생각하는 쪽.
6.
이게 그냥 해피 엔딩 이라기보단... 아주 큰 우울과 무기력에서 빠져나온 후에 받아 든 해피 엔딩이라서 더 좋았던 거야. 그 과정에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가를 한껏 체험하게 해 주거든. 그런 의미에서 나샤라는 인물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어떨 땐 이쪽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이성을 잃는다는 것을 이렇게 낭만적으로 그리다니.
7.
여러모로 사회적인 메타포가 다량 담겨있는 영화였다. 영화 중간 저녁 식사 장면은 대사도 그렇고 꽤 직설적이라고 할만했어. 선장 부부의 캐릭터는 정말 말 할 것도 없고. 근데 영화 중간 총알이 이 정치인의 얼굴을 스친다는 전개는, 이 영화 촬영 기간을 생각했을 때 소름 끼치는 대단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싶다. 혹은, 이런 인간군상에게 벌어질 일들이란 건 어느 시대든 크게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8.
봉준호 감독 영화를 볼 때 마다 느끼는 건데, 영화 음악을 잘 쓰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에 쓰인 음악이 그 감정을 정말 잘 고조시키는 것 같다고 느꼈거든. 그런 의미에서 정재일 음악감독에 대한 언급도 해야겠지. <기생충>의 음악도 이 분 작품이라는데.
9.
아무튼 즐거운 영화였습니다 <미키 17>. 영화 끝나자마자 뒷자리에서 "재밌다!" 라는 말이 나오더라고. 그나저나 이젠 당분간 영화관 갈 일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개봉 예정작 중에 엄청 땡기는 영화도 없고, 애초에 나는 영화관에서 신작을 보기는 커녕 보고 싶어요 리스트에 쌓여 있는 과거 영화들 처리하기에도 바빴던 사람이라서 말이야. 이상하게 이번 한 달 동안 영화관 갈 일이 몰려버렸다. 근데 그 세 번 동안 집 바로 옆 걸어서 한 15분 거리 정도 되는 곳에 있는 영화관은 한 번도 못 가보다니.
10.
다 쓰고보니 영화를 재밌게 본 것에 비해 좀 서둘러서 글을 써낸 것 같다. 게임 해야해... 이 귀한 연휴... 할 수 있는 만큼 해야해...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야...
봉준호, 2025 '문화시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루탈리스트>를 보고 왔다. (0) 2025.02.23 <벌집의 정령>을 보고 왔다. (3) 2025.02.09 <조커: 폴리 아 되>를 보고 왔다. (9) 2024.10.03 <인사이드 아웃 2>를 보고 왔다. (0) 2024.06.29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보고 왔다. (1) 2024.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