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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든 생각일요감상회 2023. 6. 11. 17:16
미셸 공드리, 2004 1.
소위 말하는 예술 영화(쌍따옴표 제스처)들은 대부분 남에게 선뜻 추천하기가 어렵다. 나는 《시네도키, 뉴욕》을 재밌게 봤는데 이걸 남한테 추천한 적은 없다. 이걸 보고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인물이면 이미 이 영화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추천만 받고 그냥 안 볼 것이 눈에 훤하더라. 이번 주의 영화로 선택한 《이터널 선샤인》은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 중에서도 남에게 추천하기에 적절한 영화가 아닐까 싶은 이미지가 있었다. 예상 외로 주변에 나보다 먼저 본 사람도 몇 있더라. 오히려 내가 "이걸 아직 안 봤어?"라는 느낌이었다.
2.
시작하기 앞서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에 대해. 지금 자꾸 쌍따옴표 붙이고 비꼬듯이 말하고 있다. 나는 가끔씩 사람들이 너무 벽을 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평론가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는 영화, 난해하고 어려운 영화 그리고 숨겨진 의미가 있고 무언가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영화로 보는 듯한 느낌. 그런 부분이 존재함을 100%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겁먹고 들어갈 필요도 없지 않나 싶다. 봉준호 감독이 했던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 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원문은 영화 자막에 대한 이야기지만, 영화 혹은 다른 모든 취미생활에 있어 어느 정도의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벽을 치는 자세가 잘못하면 "그런 영화들이 잘못된 거야"라는 비뚤어진 마음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나는 남이 영화를 왜 보냐고 물으면 영화를 재밌어서 본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씩 영화를 골라 보는 사람들을 허영심 취급하는 사람들이 보이더라고.
3.
아무튼 이번 영화 이야기. 최근 사랑 이야기를 자주 보는 것 같다. 《펀치 드렁크 러브》, 《빅 피쉬》. 넓게 분류하면 《바람이 분다》도 사랑 이야기 아닌가? 이번에 본 《이터널 선샤인》은 마치 궁극의 사랑 영화였던 것 같다. 신파적인 요소가 과하지 않았음에도 절절함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결말에서의 한 마디, 한 단어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4.
영화의 계절은 겨울. 얼어붙은 강, 해변가, 눈밭 등. 야외 장소들은 대부분 쓸쓸한데 그 분위기가 마냥 차갑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모순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영화를 좋아하나 보다.
5.
현실적이면서도 아주 주요한 공상과학 소재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각본가의 테이스트가 강하게 느껴진다. 찰리 카우프만. 위에서 굳이 언급한 《시네도키, 뉴욕》이나 《존 말코비치 되기》 등. 오히려 100% SF보다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세계에 적지만 커다란 상상력을 더하는 방식이 더 비현실적이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도 예고편을 봤는데 범상치 않았다.
6.
기억을 지운다는 아이디어를 영화 전개의 시간순서를 뒤섞음으로써 구현했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즐거움도 들고, 메시지도 한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
7.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그 유명한 짐 캐리다. 《마스크》의 그 짐 캐리. 어떤 영화의 주연을 맡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배우의 기술력 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가, 이전에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 이번 영화에서는 그의 전작들과 대비되는 우울에 빠진 남자를 연기했다. 일단 영화를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짐 캐리는 이런 연기를 해온 배우'라는 평행우주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마스크》의 짐 캐리 얼굴을 보는 게 어색하게 다가오고 있다.
8.
짐 캐리뿐만이 아니라 스티브 카렐, 애덤 샌들러 등. 코미디언으로 분류되는 배우들이 가끔씩 아주 우울하거나 신경질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가 있다. 그 시도가 항상 성공한다고는 못하겠지만, 그 시도 자체로 주는 강렬한 감정이 존재한다.
인상 깊었던 장면 1 영화 대부분은 회상이나 시술로 인해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그 모습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첫 번째 장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평범한 회상처럼 시작해서 갑자기 멀쩡한 도서관의 조명이 하나씩 꺼지고 문을 지나니 주인공의 친구 집으로 되돌아온다. 배경을 블러처리한다던가 배경 인물들의 얼굴을 뭉개고 서점의 책들을 거꾸로 꽂아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등 재치 있는 미장센이 많았다.
인상 깊었던 장면 2 엔딩 장면. 조금 직설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 영화를 이렇게 끝내면 어쩔 수 없이 계속 생각 날 수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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