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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최후의 밤>을 보고 든 생각일요감상회 2024. 6. 30. 13:51
비간, 2018 1.
문득 중국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홍콩 영화는 <화양연화>를 대표적으로 유명한 게 여럿 떠오르는데, 사실 대부분 왕가위 영화들인 것 같긴 하지만, 중국 영화는 진짜 떠오르는 게 없었거든. 범위를 넓혀봐도 떠오르는 건 애국주의가 담긴 그런 영화들.
2.
약간 우리나라 커뮤니티에서 동서의 이웃나라 영화들을 보며 조롱하는 분위기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중국 영화는 저열한 국뽕, 일본 영화는 오글거리는 코스프레 쇼.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본에서는 <드라이브 마이 카>, <어느 가족>,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같은 영화들이 21세기 들어서도 제작되어 왔었고, 중국에도 이 <지구 최후의 밤> 같은 걸출한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실제로 그 영화 시장에 어떤 불쾌한 경향성이라던가 정치 사회적인 장애물들이 절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마냥 덮어두고 별로라고 치부할 영화계들은 아니야.
3.
아무튼 그래서 한 번 봐볼까 싶은 중국 영화 후보를 몇 개 추렸었다. <패왕별희>도 봐야하고, 지아장커라는 감독도 대단하다던데. 하지만 그중에서 <지구 최후의 밤>을 선택한 이유. 탕웨이가 나온다. 아 <헤어질 결심> 진짜 머리에 강렬하게 남았었지.
4.
그렇게 재생을 시작한 <지구 최후의 밤>. 영화는 두 파트로 나뉘는데, 시간 흐름이 뒤죽박죽하고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 첫 번째 파트가 우릴 맞이한다. 어... 어... 어... 모르겠어...
5.
그리고 영화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고, 시간상 정중앙에 타이틀을 띄우는 희한한 배치와 함께 시작되는 두 번째 파트.
퍼-엉 영화를 다 보고 나선 정말, 10점.. 10점이요. 대단했다.
6.
편의상 1부, 2부라고 하자. 일단 구성적으로 대단했다. 1부의 그 혼란스러운 편집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1시간가량의 롱테이크 촬영. 처음엔 "갑자기 여기서 타이틀이 뜬다고?"라는 생각에 신경 쓰고 있지 못했다가 이게 롱테이크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헉 소리가 나더라고.
7.
그리고 그 내용. 2부는 중국 시골의 작은 축제장을 배경으로 진행되는데, 그 흐름 속에서 1부에서 나왔던 요소들이 암시된다. 탁구, 자몽, 사과와 꿀, 회전 등등. 일단 여기서 위의 침착맨 클립처럼 1부의 그 복잡한 이미지들이 정리되며 몰입도가 상승한다.
8.
특정한 색상이 내포하는 감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영화였다. 소위 "난 보랏빛이 좋아" 메타. 아무튼 탕웨이의 청록색 착장을 가지고 비슷한 효과를 이끌어냈던 <헤어질 결심>이 생각나는 부분. <지구 최후의 밤>에서는 녹색과 붉은색이 강하게 대비된다.
9.
녹색은 시계로 대표되는 영원을 상징하는 듯했다. 1부에서 완치원은 내내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채 등장하고 초록색 자몽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1부에서 주인공 뤄홍우는 완치원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회상인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게 씬들을 차지한다. 녹색은 또 한편으로 생명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 그 자체로 삶을 의미하는 색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녹색은, 삶,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동안 지독하게 나를 붙잡는 과거의 기억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 기억들.
10.
붉은색은 반대로 폭죽으로 대표되는 순간을 상징하는 듯하다. 2부에선 완치원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인 카이전이 등장한다. 카이전의 의상은 새빨간 무스탕 자켓. 그리고 또 중요하게 나타나는 인물이 있는데, 빨간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한 여자가 나온다. 1부에서 암시되었던 주인공의 어머니가 연상되는 인물. 일련의 사건 후 그녀는 주인공이 붉은색 사과를 건네자 미친놈이라며 그것을 거절한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주인공이 심까지 먹어치우는 그 사과는 인간이 감정적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탐하고자 하는 어떤 가치를 나타내는 것 같다. 2부의 구성은 앞서 말했듯이 대단한 롱테이크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안엔 여러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정말로 회전하는 집의 중심에서 입을 맞추는 두 주인공과, 붉은색 향수병에 담긴 폭죽을 비추며 끝난다. 앞서 내가 생각하기에 붉은색이 상징하는 것은 순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붉은색의 2부가 상징하는 것은 영화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영화란 삶의 재현 아니겠어. 한 개인의 영원하고도 지독한 기억을 토대로, 그것을 순간으로 바꾸어, 허전함을 채워줄 가치들을 담아 아름답게 포장한 것이 바로 영화 아닐까.
11.
결국 꿈보다 해몽이지만. 아무튼 영화가 너무 좋아서 오랜만에 감상이 폭주하는 듯하다. 어려운 영화라고 들었는데 따로 해설도 안보고 이렇게 쭉쭉 내뽑고 있다.
12.
몰랐는데 2부는 실제로 3D 영화 형식으로 촬영했다는것 같다. 3D로 감상할 수 있었다면 몰입도가 더 대단했을 것 같은데.
인상 깊었던 장면 1 이런 영화의 섬세한 표현들이 너무 좋았다. 1부에서 전개를 따라가는 것은 힘겨웠지만, 그냥 느릿느릿하고도 섬세하게 아름다운 그 화면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좋았단 생각도 든다.
인상 깊었던 장면 2 노래 좋더라. 사실 그리고 살짝 피식했었어 이 장면에선. 저 중절모 저 센스 ㅋㅋ.
인상 깊었던 장면 3 연기를 신기하고 독특하게 잘하는 느낌이었다. 아마 완치원이 지웠다는 아이를 암시하는 인물이겠지.
인상 깊었던 장면 4 뭐랄까 길게 이야기하는 걸로 이 감상을 다 전달하기가 어렵고, 그냥 너무 감각적이란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오늘의 다음 일정 때문에 좀 빠듯하게 이 글을 썼는데, 그 틈에서도 저렇게 주절주절을 많이 했다니. 예상치 못한 명작에 치인 느낌이라 기분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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