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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을 보고 든 생각일요감상회 2025. 5. 18. 16:21
이창동, 2000
1.
때는 바야흐로 이번 주 화요일, 좋아하는 소설의 신권이 나왔단 소식에 퇴근길 교보문고에 들렀던 날이었다. 막상 갔더니 사려했던 책은 재고가 하나도 없고, 서점에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잔뜩 진열되어 있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 주 일요일이 5월 18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책이 가진 마력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는 특별히 이 날을 위해 영화의 선택을 변경할 계획은 없었는데 문득 보려 했던 영화를 뒤로 미루고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그렇게 충동적으로 <소년이 온다>도 한 권 사버렸는데, 시간 없다는 핑계 대면서 영화도 쉬어버린 주제에 이거 언제쯤 다 읽을 수 있을런지.
2.
사실 같은 감독 영화 연달아 보는 거 별로 선호하진 않는 편이다. <킬 빌> 시리즈는 그냥 한 호흡에 다 봐야겠단 생각을 해서 2주 연달아 봤던 기억이 있는데, 매주 영화를 고를 때 최근 본 감독은 덜 고르려고 엄청 신경 쓰는 편. 하지만 앞서 말했던 일화도 있고, 지난번 봤던 <시>에 완전 치여버린 입장에서 아주 큰 기대감을 갖고 <박하사탕>을 선택했다. 사실 언젠간 보게 될 영화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장면 중 하나를 갖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야 본 게 늦은 걸 수도 있지.
3.
이번에도 3번째 문단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엄청 울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처음 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이렇게 펑펑 울만한 느낌보다는 보고 나서 뭔가 강한 충격을 받은 듯한 감상을 가졌었는데, 전체적으로 아주 진득한 감정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 같단 생각이 든다. 어디서 울었는지는 뒤에서 더 이야기해 보자.
4.이 영화를 다루면서 굳이 언급하지 않기가 어려운 "나 다시 돌아갈래" 장면은 영화의 첫 챕터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특이한 영화인데, 이렇게 주인공이 자살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주인공이 살아온 삶을 역순으로 따라간다. 첫 챕터에서부터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주인공이 어떤 사연을 갖고 철길 위에 올라섰는지를 이 장면 이후 처음부터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가며 보여주는 듯한 영화였다.
5.
여기서 느낀 첫 번째 감정은, 영화적으로 재밌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역순 구조에 대해서 미리 사전에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수용하는 태도를 갖고 영화를 보았다. 초반부 이렇게까지 엉망인 주인공을 보면서 그가 갖고 있을 과거에 대해서 짐작하며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6.
그렇게 타고 타고 내려가 도달한 곳에 박하사탕이 갖는 새하얀 이미지와 같은 순수함이 있기를 기대하지만, 주인공의 자살로부터 시작해 이미 한껏 망가지고 타락한 주인공을 영화 내내 겪은 다음에야 만나는 사탕이 어떻게 마냥 달기만 할 수 있을까.
7.
주인공 영호에 대해서 집중하자면 여타 이창동 감독 영화와 같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일부 갖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호는 영화상 순서대로 사업가, 형사, 군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챕터에서 그는 첫사랑 순임에게 자신은 사진 찍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시대는 그에게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입혔고, 그 속에서 처참히 부서진 영호는 결국 마지막 순간 순수로의 복귀를 절규하며 기차에 몸을 내던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에 응답하듯 거꾸로 가는 기차를 통해 그에게 시간 여행을 선사한다.
8.
예술로서 추구하는 순수함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시>에서의 주제 또한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그것이 지닌 가치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창동 감독은 평생 동안 그 답을 찾길 열망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9.
5월 18일이라는 이유로 이 영화를 선택하긴 했지만 영화의 모든 부분이 그날에 집중되어있지는 않다. 물론 5.18이 갖는 무게감이 조금 더 무겁긴 하지만 영화에선 IMF, 6월 항쟁과 같은 다른 20세기 후반 한국의 주요 사건들 또한 등장한다. 이런 각각의 사건들이 아주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더라도 영화는 그것들이 움켜쥐고 있는 듯한 시대를 그려 휩쓸려갈 수밖에 없었던 한 인물의 비극을 그리는 영화인 것이다.
10.
그래서 참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고, 근데 마냥 불쌍하기만 했다기보단 아주 최선을 다해서 운동권 학생들 고문하는 주인공 보고 있으면 되려 화도 나고, 마음이 참 복잡한 영화였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주인공에게 몰입이 되기 마련인데, 그러한 고문 장면에선 오히려 주인공이 마치 도저히 감정 이입이 불가능한 잔인한 시스템 그 자체로 보이고, 겁에 질려 울고 있는 학생에게 더 몰입을 하고 있더라고. 이 또한 앞서 말한 주제의식과의 연결고리가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1.
이 모든 내용을 떠올리고 나니까 마지막 장면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한 방식, 타락하게 된 계기 등 모든 것을 겪은 다음 그가 경험한 순수를 보여주는 엔딩. 처연하게도 느껴지고, 어떤 면에선 그럼에도 여전히 순수함은 남아있다는 말처럼도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 조명이 참 밝았거든...
12.
작년 마무리하면서 한 해 동안 봤던 영화 중 최고작을 뽑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쯤 되니까 올해는 의미가 없겠다 싶을 지경이다. 영화는 1시쯤에 다 봤는데 아직도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다. 세상에 좋은 영화가 너무 많아. 좋은 영화만 찾아봐도 평생 다 못 보겠어.
인상 깊었던 장면 1 기차 이야기를 빼먹을 수 없지. 챕터가 바뀔 때마다 거꾸로 가는 기차의 시선을 보여주기도 하고, 마치 기차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이 묘사한다. 챕터가 바뀔 때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챕터 도중에도 기차가 등장한다. 영호가 필름을 망가뜨리고 처량히 무너지는 순간 기차가 그 뒤로 지나가는 이 장면에선 이런게 정말 영화의 매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 2 다른 영화였다면 이런 장면에서 안 울었을걸. 이 영화가 가진 구조적 특성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장면이었던 것 같다. 무고한 소녀를 실수로 사살했다는 상황 설정 자체의 안타까움도 있지만 이 소녀와 순임과의 오버랩, 그리고 지금까지의 챕터에서 과격하기만 했던 영호가 겁에 잔뜩 질려서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합쳐져 그 안타까움과 주제의식이 더 크게 다가오는 듯했다. 그래서 저 순간 영호가 쏴버린것이 무엇인지가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던 것이고, 그래서 펑펑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연기가 너무 대단했어. 별다른 특수 분장도 없었던 것 같은데 40대에서 20대까지의 모습과 태도가 어쩜 이렇게 자연스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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