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명문, 사람의 온기가 그립다.변명문 2026. 4. 26. 20:15
라는 제목을 붙이면 신나서 나를 놀리려들 사람들의 얼굴이 벌써 눈에 선하다. 오늘은 짜증이 확 나버려 영화를 안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짜증 이야기가 나온 김에 평소에 마음속에 묵히고 있던 짜증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제목은 그 짜증을 요약한 것이다. 근데 것보다 서두에서는 왜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는지 변명부터 해야겠군. 사실 체감상 요즘 영화 보는 횟수가 많이 줄어든 것 같아서 새삼스럽게 무슨 변명문이냐 싶지만, 오늘은 일요일의 끝자락이 와버린 이 시간에도 불구하고 정말 보고 싶은 영화 하나 생각해둔게 있었거든. 귀찮아서 안 봤다는 변명이 아니라 진짜 볼 생각이었다는 말. 봐야겠단 마음을 먹고 미리 검색도 해서 "음 구글 결과를 보니 넷플릭스 표시가 보이는군." 안심하고, 오후 동안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빨래와 식사를 마무리하고, 이제 방에 불도 끄고, 헤드셋도 착용한 상태로 넷플릭스에 들어간 나를 이런 화면이 반겨주었다.

저저 옹졸한 알림 받기 버튼을 보라. 아오 넷플릭스... 니들이 서비스 중인 영화가 아니면 구글 검색 결과에 서비스 중인 것 처럼 내보내지 말라고... 심지어 지난주도 이미 점찍어 뒀던 <폭스캐처>를 보는데 실패해 버린 나는 지금 급성 스트레스 과다 상태에 빠져버렸다. 영화고 뭐고 다 집어치울래.1.
아무튼, 영화가 유독 이런 경험이 많은 것 같다. 음악은 왠만한건 거의 다 유튜브 뮤직에서 들을 수 있고, 게임도 워낙 스팀 같은 사이트가 잘 되어 있는 덕분에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접근이 가능한 것 같거든. 근데 영화는, 이해관계가 너무 얽혀버린 탓일까. 극장 개봉은 이미 한참 옛날에 끝났고, 구매도, OTT도 찾아볼 수 없어서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상황을 지금 벌써 3번째 겪고 있다. 지금껏 말은 안 했지만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 이것도 볼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지나버린 시간이 1년이 넘은 것 같다. "아니 얼마 전에 재개봉 했었는데 보러 가지 그랬어요?"라는 질문은 지금의 내 기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제한 상영이란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그날 그 시간에 내 스케줄을 맞추지 못하면 나는 또 그 영화 볼 기회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거야. OTT가 그 희망이 될 줄 알았는데 왜 OTT는 항상 작품을 기간제로 가지고 있는 거지? 이게 다 너무 머리 아픈 시장 논리 때문인 것 아닌가. 낭만이라곤 다 나가죽은 자본가들을 타파하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버린 나는 머릿속이 시뻘게지고 있는 지경이다.
2.
요즘 근데 소위 말하는 뭔가 삘이 확 오는 작품을 찾은 지가 좀 오래된 것 같다. "와 이건 진짜 꼭 봐야 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이 돌아버려 일요일 해야 할 일 다 제쳐두고 영화 재생을 누르게 만드는 그런 작품. 어떻게 보면 이건 작품 자체의 능력이라기보단 마케팅의 능력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하나 그리고 둘>이 오랜만에 내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영화였으나... 쨌든 이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자. 다른 더 할 이야기도 남았으니.
3.
이쯤되면 그래서 제목은 왜 저따위로 지었냐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사실 요즘 은은하게 내 감정을 자꾸만 상하게 만드는 세상의 변화가 있다. 이거 때문에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오히려 세상이 더 좋아지는 과정의 증거일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지금 당장 내 기분엔 이상한 생체기를 내고 있는 변화들. AI 슬롭이라고 들어봤는가.
4.
내 블로그에서는 독후감도 종종 업로드된다. 종종이라기엔 요즘엔 비율만 따졌을 땐 영화 못지않게 자주 올라오는 것 같지만. 아무튼 몇 달 전의 일이다. <자몽살구클럽>을 읽었던 나는 그 책의 내용을 썩 좋아하진 않았다. 비판의 감상을 담은 독후감을 블로그에 올려두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감상은 어땠을까 싶은 궁금증이 순간 들어 나는 구글링을 해봤었다. 그리고 다음 글을 발견했다.
심지어 작성일 기준 아직도 티스토리에 멀쩡히 살아있다. 말했듯이 나는 <자몽살구클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다가왔다. 순간 모욕적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호불호가 갈린다고 할지라도, 그 책은 이런 식으로 다뤄질 내용이 아니었는데. <자몽살구클럽>에 대한 비판으로 나는 작가가 본인이 창조한 인물들에 대해 더 책임을 져줬으면 한다는 평을 남겼었다. 그렇다면 독자의 책임은? "아 작가가 잘했네 못했네" 팔짱 끼고 한 발 멀리 떨어져 서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쉽게 떠나버리는 것이 독자일까. 나는 감상자의 역할은 그 시간 동안 작품의 세계에 들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작품에게 책임을 져야 하듯, 감상자도 감상이란 행위에 좋으나 싫으나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 글을 보라,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광고를 덕지덕지 붙여놓고, 있지도 않은 말들로 작품을 소개한다. 그 잔인한 이야기를 저렇게 왜곡해서 소개한다. 아주 기분이 나빴다.
5.
사실 이건 몇개월 전의 일이라서 요즘 기분에 영향을 준 사건이라고 하기엔 뭣하다. 요즘 극도로 심해지고 있는 나의 AI 슬롭 혐오에 결정타를 먹인 이들은 바로 유튜브였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71548970 AI 슬롭은 이상한 AI 합성 이미지, AI 영상, AI 게시글만 지칭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AI 슬롭 중 가장 최악의 형태가 바로 이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AI를 사용자에게 강제로 들이미는 기획안. 마치 이것이 혁신이라는 듯이. 하지만 그 결과물은 얄팍하고 써먹지 못할 수준인데.
6.
일단 한 번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저는 AI 반대론자가 아닙니다. 내 전공이 컴퓨터공학이고, 나는 12년 전 대학교를 입학하기 전부터 그 길 하나만을 생각해 왔었고, 아직도 내 전공을 자랑스러워하고 여기에 애정을 갖고 있다. 그런 내 전공이 탄생시킨 이 위대한 발명품에 반대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벌어먹고사는 본업에서 AI는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마당이다. 당장 오늘도 나는 햇살 잘 드는 카페에 가서 클로드랑 제미나이한테 신나게 질문해 가며 코딩하고 왔는데.
7.
생성형 AI는 사람들로 하여금 결과물을 내는 일을 쉽게 해낼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어렴풋이 "아 이런 거 있으면 좋을 텐데" 싶은걸 AI한테 말하면 얼추 그럴듯하게 내 욕구에 맞는 결과물을 만들어준다. 그러니까 이게 혁신적인 발명품이란 거지. 수요를 찾아서 발명한 제품이 아니라, 그 수요를 발명해주는 제품이거든.
8.
문제는 너무 쉽다는거야. "누구나 창작이 가능한 시대"는 거창하고 찬란한 표현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조금만 문구를 추가해서, "누구나 창작이 쉽게 가능한 시대"가 마냥 밝고 긍정적이기만 할까. AI 슬롭(Slop)이란 표현이 바로 그 점을 꼬집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유 없는 창작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있다.
9.
그게 어때서요? 자꾸 그런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니까 유튜브가 영화 트레일러에 잘생긴 배우 목소리 지우고 같지도 않은 기계음 더빙을 추가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건 실험실에서나 쓰다가 이건 진짜 히트한다 싶을 때나 조심스럽게 내밀라고. 왜 자꾸 내 일상을 침범해. 나도 거창한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AI로 만든 결과물도 퀄리티만 좋으면 나는 환영한다. 조금 TMI 개인사이긴 한데 몇 주 전엔 AI로 만든 음악으로 이루어진 리스닝 파티도 다녀왔고, 그 음악의 소개글에 적잖이 감동하기도 했다.
10.
근데 수준 이하의 작품들이 너무 많다고. 0.5점 짜리 영화 보면 기분 나쁘잖아. 간단히 말해 옛날에는 작품 하나 만드는데 10의 비용이 들었다면, 요즘엔 AI 덕분에 1의 비용이 드는 거야. 그래서 옛날에는 수준 이하의 작품을 열흘에 하나쯤 봤다면 이젠 매일 보는 기분이란 거야. 그 수준 이하의 작품이란 무엇인가, 이 글에 "옆짚 김과장"이란 계정이 달아놓은 실제 인간이 손가락을 움직여 쓰긴 한건가 싶어지는 댓글! 앞서 말한 <자몽살구클럽>에 대해 헛소리 써놓은 글! 유튜브라는 거대 기업이 수준에 안 맞게 내놓은 허접한 기능!
11.
그리고 이 모든 불만은 정확히 인간을 노리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하겠다. 문제는 도구가 아니다. 자신의 작품에 책임을 져라 창작자들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자 사람들아. 나도 이 글을 쓴 사람으로서, 이 글이 업로드 되어 널리 퍼져 지나치게 날이 선 화자의 태도로 인한 비판의 목소리가 인터넷에 넘쳐나더라도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인 채, 당당히 키배를 뜰 의향이 있다고 선언하는 바이다.
12.
오늘 확인한 내 블로그 알림함이다. 그래도 스팸 댓글 휴지통 보내기 기능을 마련해 준 게 어디야 싶지만. 솔직히 스팸 댓글로 휴지통 간 댓글 아니더라도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들 중 실제 사람이 타이핑해서 쓴 댓글이 얼마나 될까. 티스토리는 망했다. 사람이 없어서 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글에다 대고 반대 의견을 달면 정말 기뻐하며 키배를 뜰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들이여 얼른 댓글 좀 달아주세요... 저는 사람의 온기가 그립습니다...
'변명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명문, 비싼 숙취 (0) 2025.12.14 변명문, 일요감상회, 무엇이 문제인가. (1) 2025.10.27 변명문, 나는 취미가 너무 많아 (1) 2025.05.11 변명문, 근하신년 (2) 2025.01.05 변명문, 장기 휴식 (8) 2024.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