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감상회

<파벨만스>를 보고 든 생각

언덕뵈기 2025. 2. 2. 18:49
스티븐 스필버그, 2022

 
1.
설 동안 잘 쉬었...다고 방심한 연휴의 끝자락 금요일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감기몸살로 사경을 헤매는 바람에 이번 주 영화도 쉬어야 하는 것인가 걱정하였으나 하루 푹 자고 났더니 갑자기 몸 컨디션이 120%가 되어 버려 러닝타임 5시간짜리 영화도 거뜬히 소화할 힘과 책임을 느끼는 중인 일요일 오늘의 영화는 할리우드 최고의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본인의 인생을 그대로 담아 만든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
 
2.
와 진짜 너무 재밌었다 이 영화. 벌써부터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작이 나온건가 싶을 정도. 아니 영화가 왜 벌써 끝나 싶을 정도로 2시간 30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느낌이었다. 또 이걸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영화가 걸리는 부분 없이 아주 유려하게 잘 흘러갔다는 느낌도 있다. 이것이 스필버그의 힘인가.
 
3.
말했듯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인데, 본인 스스로 밝히기 쉽지 않았을 내용이 줄거리의 핵심으로 그려진다. 어머니의 외도와 부모님의 이혼. 그럼에도 절대 비판이나 원망적인 시선이 담겨있지 않다. 심지어 이 영화는 아주 따뜻하다. 사실 이런 자전적인 이야기엔 약간 자기 연민적인 시선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바람이 분다> 라든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처럼, 왠지 얼굴이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잠시 뒤로하고, <파벨만스>는 아주 따뜻하고 가족적이어서 온 가족이 볼만한, 불륜을 다룬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4.
사실 불륜을 다뤘다는건 좀 농담 식으로 말한 것이고, 진짜 중심에 있는 것은 영화를 만들기 좋아하는 주인공 새미 그 자신이다. 어릴 때 처음 갔던 극장에서 느낀 충격 이후로 영화를 찍는 것에 매료된 새미. 새미의 촬영물들을 보여주며 대견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한 다양한 감정을 영화가 전달해 준다. 그중 두 작품이 인상 깊었다.
 
5.
하나는 가족들의 캠핑 모습을 찍은 영화이다. 필름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어머니의 불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원인이 되는 그 작품. 집안 분위기 난장판으로 만든 그 작품. 눈여겨볼 부분은 촬영분에 정확히 찍혀 있던 외도의 현장을 새미가 편집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숨길 만한 내용이긴 하지.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 외면하고 덮어둔 사실은 스멀스멀 냄새를 풍기며 집안 분위기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것. 물론 내가 지금 거기서 사실대로 밝혔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진짜 흥미롭게 바라봐야 할 점은 그런 자가 검열의 과거를 지금 이 제목을 <스필버그스>라고 바꿔 불러도 될 만한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에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땐 숨겨놓고 지금 전 세계 사람들한테 다 보여주고 있잖아.
 
6.
그리고 이런 행동은 그 다음 인상 깊었던 작품에서 설명이 되는 듯하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새미가 전학을 간 고등학교의 졸업 파티에서 상영된 영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괴롭히던 전형적인 미국 학교 일진을 새미는 아주 멋지게, 보통 멋진 게 아니라 <올림피아>에 나온 금메달리스트 마냥 묘사해 학교 최고의 킹카로 만들어준다. 그 옆에 있는 따까리처럼 영화로 혼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미화당한 당사자조차 납득할 수 없어 주인공에게 찾아가 슈퍼맨으로 만들어준 은혜도 모르고 한바탕 따지고야 만다. 대체 왜 그런 거냐고. 근데 본인도 모르겠대. 그냥 자기 영화 잘 만들어보려고 그랬나. 모르겠단다.
 
7.
이 부분이 참 뭐랄까. 한 평생을 영화 만들기에 온전히 바친 사람이 할 만한 이야기 같았다. 그런 점에서 앞서 살짝 언급했던 <바람이 분다>와 같은 감정이 느껴졌던 것 같다. 그 영화 감상문 쓸 때도 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름다웠다"라고.
 
8.
다만 <바람이 분다>는 그 말을 정말 미야자키 하야오스럽게 했던 거고, <파벨만스>는 그 말을 정말 스티븐 스필버그스럽게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점에서 이 노장, 거장들의 작품 세계와 열정과 그 개성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본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멋지게 포장해 내놓은 영화라는 매체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고.
 
9.
약간 하던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이 과학자와 예술가의 사이에서 태어나 둘 모두에게 받은 온전한 사랑 덕분에 자신의 영화감독이라는 정체성이 자라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10.
또 따른 소리인데, 아까 <올림피아>를 언급했다. 이 영화가 또 그 유명한 레니 리펜슈탈 작품이란 말이지. 굳이 우리 전형적인 미국 학교 일진 친구를 그렇게 묘사한 것도 그렇고 약간 메타적인 조롱의 의미도 있진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는 건 상상력이 너무 나간 것일까.
 


인상 깊었던 장면 1

씬 스틸러 그 자체. 일단 상황 자체가 너무 웃기긴 했는데 사실 하는 이야기를 뜯어보면 가히 스필버그 본인이 배우의 입을 빌려 70살 인생에서 얻은 교훈을 말해주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진지하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대체 뭔지...
 

인상 깊었던 장면 2

여기는 사실 특별히 이 장면이 유독 인상 깊었다기보단 이 인물이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 주인공 입장에선 마음 복잡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장면, 인물 아니었겠나. 으 나쁜 사람일 거라면 그냥 나쁜 모습 그대로 남아줘 제발.
 

인상 깊었던 장면 3

나 같은 무신론자도 보자마자 "신성모독이다!"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아무튼 이 장면은 진짜 그냥 순수하게 웃겨서...
 

인상 깊었던 장면 4

얼마 전 타계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분한 존 포드. 여기서 이야기 한 지평선에 대한 담론이 참 인상 깊더라고. 그리고 여기에서 이어지는 재치 있는 마지막 장면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