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감상회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고 든 생각

언덕뵈기 2024. 3. 31. 14:50

마틴 맥도나, 2022

 

1.

2022년에 개봉한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 일요감상회에서 이렇게 최근 영화를 본 것은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있긴 했구나. 그게 2023년 개봉작이었네.

 

2.

마틴 맥도나, "21세기의 셰익스피어"라는 살벌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영화감독 겸 극작가다. 대표작으로는 <킬러들의 도시>와 <쓰리 빌보드>. 나는 그중 <쓰리 빌보드>를 몇 년 전에 봤고,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오늘 영화를 보고 나서 <킬러들의 도시>도 보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고 있다.

 

3.

<이니셰린의 밴시>는 개봉 했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영화였다. 그래서 시놉시스도 대충 한 번 미리 읽어본 상태였다. 잘 지내고 있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절교를 선언하며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영화. 솔직히 말하자면, 시놉시스 만으로는 당최 뭔 이야기인지 감이 안 잡혔고, 그 절교의 이유에 집중하는 영화인가 싶었다.

 

4.

그리고 대충 들려오는 이야기가 아일랜드 내전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는 영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영화를 재생하고 처음 몇 분 동안은, "사실 두 인물이 내전과 관련해 어떤 정치적인 의견차가 있었던 건가..? 술김에 주인공이 말실수해버린거고..."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5.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거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콜름은 파우릭이 지루해졌다고 말한다. 그게 전부다. 그 고백이 만우절의 거짓말도 아니고, 숨겨진 속내를 교묘히 피해 가는 것도 아니다. 콜름은 그저 권태에 빠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저"라고 표현하기엔 그것이 그에게 너무나도 큰 실존적인 위기였다. 개인적으로 나도 가끔씩 저런 행동을 취할 때가 있어서 그 태도가 공감 가긴 하더라. 손가락을 자를 정도는 아니지만.

 

6.

그런데 영화에서 내전은 계속해서 간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이 영화가 아일랜드 내전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고 볼수도 있고, 혹은 감독이 자기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일랜드 내전을 가져왔다고 볼 수도 있다. <바람이 분다>가 생각나는군. 이런 이야기들은 정말 대단하지 않나?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라니.

 

7.

<바람이 분다>를 이야기하긴 했지만, 둘 사이에 내용적으로는 큰 공통점은 없다고 본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영화는 감독의 전작 <쓰리 빌보드>였다. <쓰리 빌보드>는 참척의 슬픔이라는 끔찍한 이야기를 가져와 "상처받은 이는 다른 이를 상처 입힐 수밖에 없다"라고 한탄하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가 그 이야기와 닿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번엔 그것을 더 차갑고, 척박한 땅에서 더 냉정한 표현으로 말하고 있었다.

 

8.

앞서 콜름의 태도에 공감하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파우릭의 태도 또한 공감 가는 면이 있었다. 솔직히 전반적인 인물상은 파우릭에 더 가깝지. 그렇게 충돌하는 둘을 한 데 모아 놓은 인간이라니, 끔찍한걸.

 

9.

평론을 찾아보는 것이 특히 재밌는 영화였다. 왓챠에 훌륭한 글들이 많더라.

 


인상 깊었던 장면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지 어느덧 한 달이 훌쩍 넘은 것 같은데, 이 장면을 보면서 입 안에서 술 냄새가 올라오더라. 주요 인물 넷이 모두 아카데미 연기상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배우들의 호연이 주목받은 영화였다. 이 장면에 나오는 콜린 패럴과 배리 키오건, <킬링 디어>가 떠오른다. 둘 다 언제든 오스카 트로피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배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