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감상회

<설국열차>를 보고 든 생각

언덕뵈기 2024. 3. 24. 15:22

봉준호, 2013

 

1.

드디어 봉준호 영화를 블로그에 들였다! 근데 영화광으로서 봉준호 감독에 대해 경외감이 있긴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내가 봉준호 감독 작품 중에 뭘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까...'라는 고민도 함께 생긴다. 본 영화도 <괴물>, <옥자>, <기생충> 그리고 이번 <설국열차> 밖에..라고 말하고 보니까 4편이나 봤네. 아무튼 막 안 보고는 도저히 못 배기는 감독은 아니라는 느낌. 당장 10년 전에 한국인 근 천만명이 봤다는 <설국열차>를 이제야 봤다는 것도 그 반증이 아닐까. 하지만 막상 작품을 보게 되면 너무나도 재밌어서 그 이름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감독. 또 한국인으로서 워낙 이 인물의 무게감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는 것도 있고.

 

2.

근데 저 포스터 엄청 멋있지 않나? 보통 포스터를 IMDb나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오는데, <설국열차>는 검색해 보니까 투자사인 CJ ENM에서 저런 멋진 포스터를 공개해 놨더라.

 

3.

사실 <설국열차>가 워낙 유명한 영화였던 탓에 이미 줄거리를 대충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스포일러는 몇 년을 묵혀도 도저히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더라. 양갱이 어떻고, 반전이 어떻고... 그래서 내용을 아는 상태로 영화를 봤다. 근데 그 양갱의 비밀은 알고 봤는데도 순간 기절할 뻔. 내 크립토나이트가 바퀴벌레거든.

 

4.

흥행과 별개로, 은근히 <설국열차>가 봉준호의 영화 중에선 그나마 덜 좋은 영화로 알려진 측면도 있더라.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어느 정도 그 평에 공감이 됐지만, 그렇다고 또 영화가 별로라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헉할 정도로 좋았던 부분도 있었고, 봉준호의 영화 같지 않다는 느낌도 딱히 들진 않았다.

 

5.

영화가 주는 기괴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괴로운 배경과 줄거리였지만, 오히려 그 기괴함의 근원은 그것이 아니라 영화가 구축한 미술과 음악이었던 것 같다. 음악에서 <괴물>이 조금 생각나기도 하고.

 

6.

 

메시지가 강렬한 영화였다. 넷상에서 조금 오용되고 있는 것 같지만, 봉준호 감독 본인은 영화에 메시지를 담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한 말을 이렇게 잘 지킬 수 있는 능력자.

 

7.

이 영화를 다 보고, 길리엄이라는 인물에 대해 상당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꼬리칸의 정신적 지주이자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팔까지 내어줄 정도의, 심각한 성자. 결말에서 이 인물에 대한 충격적인 반전이 드러난다. 기차의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반란들이 사실 그와 윌포드의 담합이었다는. 그렇다면 길리엄은 그저 악인에 불과했을까? 혹은, 윌포드의 사상에 소극적으로 동의하는 인물이었다고 봐야 할까. 그 반전이 밝혀지기 전에 영화는 주인공의 꽤 긴 독백을 통해 그가 어떤 희생을 치렀었는지를 먼저 상소히 밝힌다. 어차피 조절해야 할 인구라면, 그는 왜 굳이 본인의 팔을 잘랐을까. 영화의 마지막에선 주인공 커티스가 결국 그의 희생을 이어 다시 베푸는 모습이 묘사된다. 영화는 그의 속내를 찝찝하게 남겨둔 채 다른 더 큰 이야기를 하면서 끝난다. 다만 그냥 내 눈에 좀 계속 신경 쓰였어. 좋은 의미로.

 

8.

블록 버스터 영화라고 할만한 규모의 영화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역시 봉준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말하길 뛰어난 영화감독들은 모두 고집이 있다고 하잖아.

 

9.

아무튼 이렇게 <설국열차>를 보고 나니까, 개봉을 앞둔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줄거리는 도저히 예상이 되지 않지만,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여럿 나온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보이는 만큼.


인상 깊었던 장면 1

영화 오프닝 보면서 진짜 감탄했다. 이거 쌔다. 정말 깔끔하고 영화 분위기가 잘 반영되면서 필요한 정보를 잘 전달해 준 영화 오프닝이었다. 검은 화면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이어지다가 불안함이 잔뜩 담긴 음악과 함께 드러나는 화면.

 

인상 깊었던 장면 2

조금 의외스러운 선택일 것 같은데, 사실 이 장면 앞에 횃불을 들고 달리는 장면이 더 강렬하긴 하고, 나는 왜 이렇게 영화에 이 배우가 나올 때마다 좋은지. 스티브 박이 나온 장면은 <파고>에서도 인상 깊은 장면으로 뽑았었고,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에서 그리 큰 역할은 아니다. 대신 약간 약방의 감초 같은 느낌으로 짧게 나온 모습들이 재밌었다. 애잔함이 있는 역할 동시에 그런 애잔함이 있는 배우.

 

인상 깊었던 장면 3

교실칸 장면에서의 분위기 전환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기괴한 교육의 현장과 갑자기 튀어나온 계란 선물.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새하얀 계란 무더기에서 꺼내져 나온 총. 반란이 소기의 목적을 이룬 후 교실칸 장면까지 영화의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워졌다가 갑작스러운 총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온다. 분위기 전환을 이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ㅎ... 이 영화의 기괴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