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를 보고 든 생각
1.
드디어 봉준호 영화를 블로그에 들였다! 근데 영화광으로서 봉준호 감독에 대해 경외감이 있긴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내가 봉준호 감독 작품 중에 뭘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까...'라는 고민도 함께 생긴다. 본 영화도 <괴물>, <옥자>, <기생충> 그리고 이번 <설국열차> 밖에..라고 말하고 보니까 4편이나 봤네. 아무튼 막 안 보고는 도저히 못 배기는 감독은 아니라는 느낌. 당장 10년 전에 한국인 근 천만명이 봤다는 <설국열차>를 이제야 봤다는 것도 그 반증이 아닐까. 하지만 막상 작품을 보게 되면 너무나도 재밌어서 그 이름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감독. 또 한국인으로서 워낙 이 인물의 무게감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는 것도 있고.
2.
근데 저 포스터 엄청 멋있지 않나? 보통 포스터를 IMDb나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오는데, <설국열차>는 검색해 보니까 투자사인 CJ ENM에서 저런 멋진 포스터를 공개해 놨더라.
3.
사실 <설국열차>가 워낙 유명한 영화였던 탓에 이미 줄거리를 대충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스포일러는 몇 년을 묵혀도 도저히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더라. 양갱이 어떻고, 반전이 어떻고... 그래서 내용을 아는 상태로 영화를 봤다. 근데 그 양갱의 비밀은 알고 봤는데도 순간 기절할 뻔. 내 크립토나이트가 바퀴벌레거든.
4.
흥행과 별개로, 은근히 <설국열차>가 봉준호의 영화 중에선 그나마 덜 좋은 영화로 알려진 측면도 있더라.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어느 정도 그 평에 공감이 됐지만, 그렇다고 또 영화가 별로라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헉할 정도로 좋았던 부분도 있었고, 봉준호의 영화 같지 않다는 느낌도 딱히 들진 않았다.
5.
영화가 주는 기괴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괴로운 배경과 줄거리였지만, 오히려 그 기괴함의 근원은 그것이 아니라 영화가 구축한 미술과 음악이었던 것 같다. 음악에서 <괴물>이 조금 생각나기도 하고.
6.
메시지가 강렬한 영화였다. 넷상에서 조금 오용되고 있는 것 같지만, 봉준호 감독 본인은 영화에 메시지를 담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한 말을 이렇게 잘 지킬 수 있는 능력자.
7.
이 영화를 다 보고, 길리엄이라는 인물에 대해 상당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꼬리칸의 정신적 지주이자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팔까지 내어줄 정도의, 심각한 성자. 결말에서 이 인물에 대한 충격적인 반전이 드러난다. 기차의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반란들이 사실 그와 윌포드의 담합이었다는. 그렇다면 길리엄은 그저 악인에 불과했을까? 혹은, 윌포드의 사상에 소극적으로 동의하는 인물이었다고 봐야 할까. 그 반전이 밝혀지기 전에 영화는 주인공의 꽤 긴 독백을 통해 그가 어떤 희생을 치렀었는지를 먼저 상소히 밝힌다. 어차피 조절해야 할 인구라면, 그는 왜 굳이 본인의 팔을 잘랐을까. 영화의 마지막에선 주인공 커티스가 결국 그의 희생을 이어 다시 베푸는 모습이 묘사된다. 영화는 그의 속내를 찝찝하게 남겨둔 채 다른 더 큰 이야기를 하면서 끝난다. 다만 그냥 내 눈에 좀 계속 신경 쓰였어. 좋은 의미로.
8.
블록 버스터 영화라고 할만한 규모의 영화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역시 봉준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말하길 뛰어난 영화감독들은 모두 고집이 있다고 하잖아.
9.
아무튼 이렇게 <설국열차>를 보고 나니까, 개봉을 앞둔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줄거리는 도저히 예상이 되지 않지만,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여럿 나온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보이는 만큼.
영화 오프닝 보면서 진짜 감탄했다. 이거 쌔다. 정말 깔끔하고 영화 분위기가 잘 반영되면서 필요한 정보를 잘 전달해 준 영화 오프닝이었다. 검은 화면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이어지다가 불안함이 잔뜩 담긴 음악과 함께 드러나는 화면.
조금 의외스러운 선택일 것 같은데, 사실 이 장면 앞에 횃불을 들고 달리는 장면이 더 강렬하긴 하고, 나는 왜 이렇게 영화에 이 배우가 나올 때마다 좋은지. 스티브 박이 나온 장면은 <파고>에서도 인상 깊은 장면으로 뽑았었고,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에서 그리 큰 역할은 아니다. 대신 약간 약방의 감초 같은 느낌으로 짧게 나온 모습들이 재밌었다. 애잔함이 있는 역할 동시에 그런 애잔함이 있는 배우.
교실칸 장면에서의 분위기 전환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기괴한 교육의 현장과 갑자기 튀어나온 계란 선물.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새하얀 계란 무더기에서 꺼내져 나온 총. 반란이 소기의 목적을 이룬 후 교실칸 장면까지 영화의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워졌다가 갑작스러운 총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온다. 분위기 전환을 이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ㅎ... 이 영화의 기괴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