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민

<브루탈리스트>를 보고 왔다.

언덕뵈기 2025. 2. 23. 01:17

2025년 2월 22일

 

0.

현재 상영 중인 영화다 보니 스포일러 주의.

 

1.

지난번 <벌집의 정령> 때 그렇게 징징거렸으나 결국 보고 왔다 <브루탈리스트>. 오늘의 사진은 3시간 30분의 러닝 타임을 견디기 위해 선택했던 든든한 저녁.

 

2.

어쩌다보니 영화관을 자주 가는 한 달이 되었다. 다음 주에는 <미키 17>도 보러 가야 하거든. 사랑니도 뽑아야 하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신작 게임도 출시하는데 바쁜 주말이 되겠군. 휴일이 하루 더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다.

 

3.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 <브루탈리스트>를 본다는 것은 약간의 부담으로도 느껴졌었다. 오늘도 몰골을 보니까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수준이더라고. 하지만 개봉 전에도 소문이 자자하더니 개봉 후 평이 워낙 좋은 영화라서 도저히 안 볼 수가 없었다. 클래식 소리까지 나올 수준이라니. 브래디 코베라는 감독 이름도 처음 듣는데 대체 무슨 영화를 만들어낸 건지 너무 궁금하더라고. 뭐 적어도 지난번 <벌집의 정령> 볼 때처럼 잇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던 수준의 컨디션은 아니니깐.

 

4.

영화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와 이 영화 첫 시퀀스 보자마자 이거는 명작이다 싶더라고. 근데 역으로 첫 시퀀스가 너무 쎄서 그 이후를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로 봐버린 것은 아닌가 싶긴 하지만. 아무튼 최근 내가 봤던 영화 중에서 오프닝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이코닉한 자유의 여신상 포스터도 그 첫 장면에서 따온 것.

 

5.

오프닝과 연결되는 건데, 예고편에도 쓰인 그 사운드트랙이 정말 강렬했다. 그 악기를 뭐라고 하지.. 아무튼 저음의 금관악기스러운 거. 웅장한 음악과 함께 이민자의 시선에서 아주 가까이, 뒤집힌 채, 흔들리는 시선으로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이라니.

 

6.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마치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팬텀 스레드>를 합쳐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필 또 내가 올 타임 베스트로 꼽는 PTA의 후기 작품들이 떠오르다니. 물론 본질을 따지자면 <브루탈리스트>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7.

<브루탈리스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계 유대인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으로부터, 전 세계의 대전에 참전했으나 침략당한 적은 없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륙하고 있는 강대국으로 넘어와 건물을 짓는 건축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8.

미국의 자본가는 주인공에게 귀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듯 하지만, 그 기저엔 멸시와 질투가 공존하는 뒤틀린 감정이 있다. 그를 만나기 전 주인공이 받은 직간접적인 거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게 영화의 후반부 충격적인 형태로 분출된다.

 

9.

이런 환경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바로 주인공의 정체성이겠지. 생각해 보면 건축가라는 직업은 정말 매력적인 소재처럼 느껴진다. 공학이면서 예술이기도 한 분야. 안 그래도 지난번에 <파벨만스> 이야기할 때 영화감독을 과학자와 예술가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라고 비유하기도 했었지. 그래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행동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10.

그 이유가 이 매체가 영화이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시작과 끝에서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는 뒤집힌 두 상징에서도 연상이 되거든. 본디 촬영이란 그 원리에 의해 필름에 상이 거꾸로 맺히는 형태잖아. 감독은 그것을 정방향으로 혹은 조금 삐딱하게 돌려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것을 마음대로 돌리는 힘은 감독에게 있고, 다만 그것을 받아들여 해석할 책임이 관객에게 있을 뿐.

 

11.

나도 내가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영화가 다 끝났을 때 당황스러워하는 듯한 분위기가 영화관 내부에서 느껴지더라. 늦은 상영 시간, 난해한 예술 영화 치고는 또 관객이 많았거든. 지난번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나 <벌집의 정령>처럼 앞뒤 좌우 아무도 없이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리를 미리 잡아 놓고 영화 시작 전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갑자기 극장에 사람이 가득 차 있길래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 있던 사람은 1부만 보고 인터미션이 거의 끝나가는 2부 시작 직전 영화관을 나가더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2.

인터미션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지. 영화의 구성 자체가 영리한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인터미션이 있다는 소식이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의 진입장벽을 낮춰줬던 것 같기도 하고.

 

13.

아무튼 근데 지금 이사 온 후 영화관을 간 게 2번째인데, 집 근처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걸어서 10분 거리의 영화관 놔두고 자꾸 저 멀리 있는 영화관을 가게 된다. 상영관이 없어... 예술영화의 서러움. 하필 또 다음 주에 보게 될 <미키 17>조차 약속을 잡고 친구와 같이 보는 거라서 저 멀리 가서 봐야 할 예정. 게다가 이번에도 상영시간이 늦어서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벌써 12시가 넘었더라고. 피곤하다, 주말인데. 아닌게 아니라 새벽 1시 넘어서 이 글을 업로드 했는데, 잠을 한 10시간 잔 다음 일어나 다시 글을 읽어보며 여러 부분을 수정했다. 글이 엉망이야. 이렇듯 영화 보기 참 쉽지 않다. 아니 영화관에서도 뒷자리 사람 왜 내 등받이를 자꾸 차대는지 나 원 참.

 

브래디 코베,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