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의 정령>을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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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환경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가 어차피 보려 하는 영화 대부분을 OTT나 기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잘 없긴 하지만, 나는 1년에 한두 번씩 소위 말하는 삘이 오는 영화를 보러 혼자 영화관을 다녀오곤 한다. 게다가 몇 달 전 새로 이사 오게 된 집 근처 걸어서 40분 거리에 CGV 아트하우스 상영관이 있다는 행운이. 심지어 여기가 경기도 유일의 아트하우스관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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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선택한 영화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1973년작 <벌집의 정령>. 스페인의 전설적인 감독 빅토르 에리세의 첫 장편 영화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작년 개봉한 영화 중 최고작으로 선택한 작품이 바로 빅토르 에리세의 30년 만의 복귀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였다. 무려 그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누르고 말이다. 그 영상을 보고 난 이후부터 감독에 대한 강한 관심이 생겼는데, 마침 이렇게 극장 재개봉을 해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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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못참고 이번 주 화요일쯤에 바로 예매를 질러 버렸지. 가뜩이나 워낙 국내엔 덜 알려진 옛날 영화 옛날 감독이라서 온라인으로 볼 방법 찾기가 어려워서 아쉬웠는데 말이야. 문제라면 내가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는 토요일 유일한 상영 시간이 밤 10시 45분이라는 것.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화요일엔 마냥 건강했던 내 오른쪽 사랑니가 수요일 갑자기 심각하게 부어선 수일째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게 될 운명이 내게 찾아오리란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 점이다. 지금은 그 모든 일을 마무리한 일요일 점심 내 방에서 편하게 누워서 글을 쓰곤 있지만, 정말 힘들었어... 내가 이래서 영화관을 잘 안 간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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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다시 영화 이야기를 하자. 전설적인 감독 빅토르 에리세. 감독 경력이 50년이나 되는 거장 감독임과 동시에, 그 50년 동안 개봉한 장편 영화가 단 4편에 불과한 과작 감독이다. 근데 그 4개 작품 모두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알면 알수록 그 이름에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감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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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의 정령>에 대한 첫인상을 떠올려 보자. 짧은 시놉시스를 읽어 봤는데 "<프랑켄슈타인>을 본 다음 영화를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는 한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그리는 영화라더라. 동심을 자극하는 영화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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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든 생각. '...뭔 내용이지...' 생각을 정리해 볼 겸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주인공 자매의 영화 관람 -> 영화에 나온 괴물을 떠올리며 정령(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이들 -> 들판에 버려진 폐가를 두고 정령이 나오는 집으로 여기는데 -> 그 집에 숨어든 청년과 마주친 주인공 -> 몰래 먹을거리와 아빠의 코트를 가져다주며 교감을 나누지만 -> 머지않아 밤중에 사살되는 청년 -> 그 흔적을 마주하게 된 아이 충격 -> 식음을 전폐하고 마음을 닫게 되는데 -> 영화 끝. 저 시놉시스가 너무 줄인 것도 같긴 한데 뭐 틀린 말은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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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왜 저 시놉시스에서 이 영화의 줄거리를 바로 연결 짓지 못했는가. 이 영화에 대해서 감히 표현하자면 이거 상당히... 지루하다! 물론 이 몸상태에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영화를 보느라 피곤했던 영향도 있었겠지만. 장면마다 호흡이 길고 여백이 많은 영화였다. 직접적이라기보단 은유적인 표현도 많았다. 그러니까 다 보고 나서 머릿속에서 테이프가 돌아갈 추가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근데 또 좋게 말하자면, 장면들이 우아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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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화라고 걱정한 것 치고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라던가 연기 디렉팅이라던가 구도라던가 전체적으로 세련된 느낌도 있었다. 그러니까 짐작해 보자면 그 능력으로 일부러 이렇게 은유적이고 난해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의미도 되겠지.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가 그 은유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프랑코 정권, 말년이라곤 해도 이 영화 개봉 당시까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이런 영화가 개봉될 수 있었던 이유가 나무위키 피셜론 어차피 이렇게 느리고 난해한 예술 영화 대중들이 관심 가지지 않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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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볼 때마다 신기한 건, 솔직히 이렇게 뜬구름 잡는 듯한 내용 속에서 내가 100% 이해 못 한 게 맞긴 하거든.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쯤 오게 되면 너무 좋은 거야. 충격에 빠져 말을 잃은 주인공 아나가 밤중 문득 침대에서 일어나 벌집 모양 창문을 열고 달빛을 받으며 마음속으로 정령을 부르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는데. 그냥 장면 자체가 슬프고 아련하고 아름다웠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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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을까. 1940년 내전이 끝나 프랑코 집권기가 시작한 스페인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다. 그게 직접적인 소재로 강하게 나타나진 않지만, 찬 바람이 내내 부는 황량한 영화의 공간들이나 어딘가 경직되어 보이는 주인공 가족의 분위기가 그 시대를 누르고 있는 듯한 압력을 나타내는듯했다. 그 속에서 순수한 얼굴의 어린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 순수한 아이는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상처를 받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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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아나를 그대로 예술이라는 키워드에 대치해서 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사회의 억압 속에서 예술의 순수성은 어떻게 짓밟히는가. 그런 점에서 영화 안에서 버섯으로 하는 은유가 기억에 남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유일하게 세 부녀가 화기애애하게 그려졌던 시퀀스인데, 그 장면은 아버지 페르난도가 위험한 독버섯을 짓밟으며 아이들은 너무 어려 올라갈 수 없다는 산속에 최고의 버섯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끝난다. 버섯을 먹는 것보다 버섯을 감별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던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위험한 독버섯은 영화의 후반부 충격을 받고 도망치는 아나의 앞에 다시 나타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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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앞서 설명했던 영화의 마지막, 아나가 달빛을 받으며 다시 정령을 찾는 장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가지는 순수성은 죽음을 맞이하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게 아닐까. 참 어려운 영화였지만 오늘도 어찌저찌 텍스트로 표현이 되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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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 특징, 해설 찾아보는 게 너무 좋다. 읽을거리가 많고 또 거기서 내 생각도 함께 발산한다. 특히 간과할만했던 시대상을 설명해 주는 글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 후대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한 작품이라고 하더라고. 무려 그 <판의 미로>가 이 영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둘 다 본 입장에선 정말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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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영화는 앞으로 차근차근 정복하고 싶다. 사실 뭐 4편밖에 없긴 하니까... 그리고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정말 궁금하다. 그 영화에 대한 평들이 너무 좋은 것도 좋은 건데, 평들을 읽어보면 영화 좋아하는 사람을 자극할 만한 말들이 많이 있더라고. 얼마 전에 개봉했을 때 봤었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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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무리 영화관이 가깝다 한들 이 엄동설한에, 이 컨디션에, 10~20분 걷는 것도 아니고 40분씩 걸어야 하는 거리... 정말 쉽지 않았다. 영화 다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중간 지점에 있는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 새벽 1시 추로스를 먹으며 원기 보충하며 사랑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초고를 쓰고 있었다. 근데 요즘 내가 또 이 추로스에도 꽂혔어. 아니 그리고 그 새벽에 그 외진 도로가 맥도날드에 사람은 왜 이렇게 많았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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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랬던고로 일요일은 보상휴무의 개념으로 아침 늦게 11시쯤 기상하였고. 제대로 벌어지지 않는 입으로 어제 새벽 편의점에서 미리 사온 수프와 샌드위치를 느릿느릿 먹은 다음 이 글을 약 2시간 정도 붙잡고 쓰다 보니 벌써 오후 2시. 이상적으론 이 <벌집의 정령>은 그냥 비정기적으로 보는 영화 관람 활동이고 일요감상회는 또 별도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냥 좀 더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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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주인공 아나 너무 귀엽더라. 영화가 필요로 한 순수한 어린아이의 얼굴 그 자체. 이 영화 이후로도 계속 스페인 내에서 배우 활동을 이어왔다고. 게다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도 다시 출연했다고 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약간 감독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던데. 너무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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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본 이번 달 기대작들. 이번 달엔 극장을 자주 찾게 될지도 모르겠군. 근데 <브루탈리스트>는 솔직히 자신 없다. 3시간 30분짜리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엄두가 도저히 나질 않는다. 언택트톡까지 포함된 걸로 보면 5시간이라던데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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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벌집의 정령> 뭔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속에서 점수가 더 올라가고 있는 듯한 영화였어. 그리고 사실 힘들긴 했지만, 영화를 보러 가는 그 길이 약간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