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감상회

<멜랑콜리아>를 보고 든 생각

언덕뵈기 2025. 3. 23. 16:01

라스 폰 트리에, 2011

 

1.

덴마크도 은근히 뛰어난 영화인이 많은 나라다. 매즈 미켈슨 같은 명배우도 있고, <더 헌트>와 <어나더 라운드>로 알려진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도 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시 라스 폰 트리에겠지. 이름부터 "폰von"이 들어가 귀티가 나는 이 인물은 영화 팬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어디 가서 감히 "저 이 사람 작품 좋아해요"라고 이름을 올릴 수 없는 감독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번 <멜랑콜리아>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2.

근데 이 사람 영화를 너무 잘 만드는 걸 어쩐담. 이번 <멜랑콜리아>가 너무 좋아서 앞으로도 영화 몇 개 더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안 그래도 최근에 내가 왓챠에서 5점 만점을 누르는 영화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거든. 4.5점과 5점의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그 이야기는 둘 다 너무 좋은데, 5점은 특히 "내가 이래서 영화를 보는구나"란 생각을 하게끔 만들면 주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영화가 그랬단 거야.

 

3.

일단 소재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볼까. 아마 이 감독은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을 앓아봤을 것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우울이란 감정을 주제로 삼았다. 주제로 삼은 정도가 아니라 그 관념을 물질화해서 영화 속 세계를 문자 그대로 덮어버렸다. 그 물질화의 결과가 지구를 집어삼켜버릴 만한 크기의 거대 행성이라니. 그리고 그게 지구를 그대로 들이박아 세상이 멸망하는 이야기라니. 이 얼마나 염세적인가.

 

4.

영화가 아주 영리하다고 할만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군더더기를 모조리 제거한듯하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2부에서 이 행성 "멜랑콜리아"는 그냥 지구를 스쳐 지나가기만 할 것이라는 과학자 남편의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가 시작할 때 이미 지구가 거대 행성에 삼켜져 박살 나는 모습을 보고 왔다. 어차피 이 영화에게 중요한 건 "멜랑콜리아"가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사실뿐이다. 이 행성이 정말로 지구를 덮칠지 아닐지를 따지는 전개상의 서스펜스는 미사여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5.

또한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을 손수 망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 나오지만, 영화는 그 우울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여기서 자세한 백스토리가 나왔다면 자칫 우울증이란 핵심 소재가 주인공이라는 한 개인 안에서만 머물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인의 부재는 그러지 않으려는 영화의 선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 영화를 두 챕터로 나눠서 1부의 우울함이 2부에게 전염되는 듯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고, 영화 속의 우울함에 빠진 등장인물 몇이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죽는 결말을 취한 게 아닐까.

 

6.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것이 중요하겠지. 그렇게 우울함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만들어 작품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쉽게 정리하자면 영화 속에서 직접 말하는 것처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악하고 그들은 우울 때문에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지극히 염세적인 주장을 펼치는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감독이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서 블러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7.

길을 가다가 하늘을 봤는데, 예를 들어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는 하늘을 봤다고 치자. 북유럽은 눈 많이 올 거니까. 아무튼 그걸 보곤 문득 이대로 눈이 그치지 않고 평생 내려서 온 세상이 눈에 덮여 망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날씨가 눈이나 비라고 한다면 그게 한 사람 머리 위에만 뿌려진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비 오는 날이 운치 있고 낭만 있는 날로, 어떤 사람에겐 빗소리가 우울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날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를 갈라 내 안에 너를 들여놓고 싶은데, 그래서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지 보여주고 싶은데". 우울한 사람은 우울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답답해한다. <멜랑콜리아>는 작품의 화자가 자신이 겪고 있는 우울함을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과 똑같이 뒤집어쓰게끔 만들고 싶단 욕심이 담겨있는 듯한 작품이었다. 이해받길 갈망했던 거야.

 

8.

솔직히 말해서 보고 나면 지치는 영화다. 어차피 모두 죽는 이야기. 영화 내내 답답하고 축 처지는 듯. 개인적으로도 오늘 특히 영화를 보고 나서 두통이 심하더라고. 감상문을 쓰는 지금도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 다음 주는 꼭 가벼운 영화를 봐야겠어.

 


인상 깊었던 장면 1

말했듯이 오프닝에서 지구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근데 이렇게 지구가 박살 나는 장면만이 아니라, 그 오프닝 시퀀스 자체가 영화의 전체 줄거리에 대한 비유를 하는 영화적 운문이었던 것 같다. 탐미적인 화면 구성으로 아무 대사 없이 강한 슬로우 모션을 넣어 감정을 고조시키는 클래식 사운드트랙과 함께. 이 영화에 사용된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인데, 괜찮은 글이 있더라. (링크) 아무튼 대단하다고 함.

 

인상 깊었던 장면 2

물론 영화가 그냥 우울하고 염세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영화를 대체 누가 보겠습니까. 바로 위에서도 탐미적이란 표현을 썼는데, "변태" 소리를 듣는 감독들이 좀 그런 게 있거든. 아름다움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가졌다고 포장해 주자. 이 장면에선 지구로 다가오고 있는 거대 행성 "멜랑콜리아"로 인해 밤하늘에 서로 다른 색상을 가진 주 광원 둘이 존재하면서 공간을 둘로 나눠 대비감을 그리고 있다. 그 공간을 지나가는 두 인물의 동선도 흥미로운데, 홀린 듯 푸른빛을 향해 가는 주인공 저스틴과 그를 몰래 뒤따르는 언니 클레어. 이다음 장면은 블로그에 올릴 순 없지만 음악과 함께 컷으로 충격을 주는데, 그 순간 다음부터는 저스틴의 태도가 뭔가 변해있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