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감상회

《파고》를 보고 든 생각

언덕뵈기 2023. 6. 17. 14:59

코엔 형제, 1996

 

1.

나는 왓챠 기능을 사용해서 보고 싶은 영화들을 체크해 놓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보고 싶은 영화는 많고, 취미가 많은 성격이라 영화 볼 시간은 적고, 그 목록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빠르더라. 그러다 보면 수년 동안 목록의 바닥에 위치하는 영화도 더러 생기기 마련. 이번 주의 《파고》도 아주 오랫동안 목록에서 숙성된 영화였다. 결국 이걸 왜 보고 싶어 했는지는 까먹었다. 아마 몇 년 전에 코엔 형제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봤었겠지.

 

2.

《파고》란 무엇인가. 파도의 높이 할 때 그 波高? 영화를 보면 그것이 배경이 되는 도시의 이름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제목의 중의적인 의미를 짚어내더라. 영화를 재생하기 전에 읽은 한줄평에서 미리 알게 되었다. 참 잘 지었네.

 

3.

내가 즐겨 보는 영화들이 대부분 영미권, 미국, 할리우드 영화인지라 미국 배경은 웬만하면 익숙하다. 아침 메뉴도 맥모닝 디럭스 브렉퍼스트를 좋아하는 편. 해외를 가본 적은 없지만 아주 아메리칸-허세가 몸에 베였는데, 이번 영화의 배경은 생소했다. 파고(Fargo) 시가 위치하는 미국의 주 노스다코타. 이곳의 지역색을 내세운 영화, 만화, 드라마를 본 기억이 없다. 아이스하키를 좋아하고 온통 눈으로 덮여있는 추운 동네. 새로운 풍경에 호감도가 조금 올라간 듯. 공교롭게도 2주 연속 겨울 배경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 여름에.

 

4.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다른 영화는 역시 같은 감독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비슷한 듯 또 상반되는 듯. 삼파전의 구조. 범죄에 엮인 일반인, 킬러, 그들을 추격하는 경찰이라는 구성이 비슷하다. 그런데 또 그 셋을 일대일로 비교하면 대비되는 성격을 가졌다. 배경도 타는 듯한 황무지의 텍사스와 차가운 눈밭의 노스다코타. 우연일까 의도일까.

 

5.

영화 초반부 까지는 무슨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감이 안 잡혔다. 그 유명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이 영화로 오스카를 받았다고 하길래 극을 이끌어가는 건가 싶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 동안을 안 나오더라. 물론 중반부부터 주인공의 역할을 맡긴 하지만.

 

6.

초반부를 지나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스노우볼링. 달리 더 붙일 미사여구가 없더라. 개인의 욕심을 위해 한 거짓말이 일을 끝도 없이 크게 만들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붙잡은 킬러에게 그깟 돈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냐 말하지만, "욕심"이라는 좀 더 크고 추상화된 개념이 그 기저에 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7.

캐릭터들이 엄청 특이했다. 또 다른 주인공이자 이 비극을 만든 악의적인 거짓말을 계획하고 실행한 자동차 딜러 제리는 소시민적이고 직장 상사인 장인어른에게 눌려 기를 못 피는 성격이다. 조금 미안한 비유지만 《지붕뚫고 하이킥》의 이순재와 정보석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추격자의 역할을 맡은 경찰, 마지 또한 특이한 캐릭터였는데, 만삭의 몸으로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성격 또한 이런 역할에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강단 있고 깐깐한 성격이 아니라 남편과 오손도손 사는 모습이 강조되고, 부드러운 하이톤으로 말하는 데에 익숙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8.

아마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쓰였을 부분일 텐데, 해당 지역의 사투리가 흥미로웠다. "야~?". 노홍철이 여기서 영어를 배웠나.

 

9.

영화가 의외로 재밌었다. "의외로"라는 게 나쁜 의미로 들릴 테지만, 좋은 걸로 유명한 90년대 영화가 생각보다 밋밋하게 다가온 적을 몇 번 겪은 바가 있었던 탓에 내심 큰 기대를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재미가 또 내가 영화를 계속 찾아보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10.

생각해 보니 일요감상회인데 토요일에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있다. 뭐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쯤이야.

 


인상 깊었던 장면 1

일이 본격적으로 심각해지기 시작하는 장면. 좀 더 정면에 나서서 행동하는 인물은 스티브 부세미가 맡은 캐릭터인데, 좀 더 강렬하게 다가온 쪽은 피터 스토메어가 연기한 이 캐릭터였다. 사실 이 둘의 결말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어서, 언제 한쪽이 다른 쪽을 죽일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 2

잔인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 가장 보기 괴로웠던 장면. 이 인물뿐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적으로 말을 더듬는 캐릭터가 많이 나왔던 것 같다. 얼굴이 너무 익숙한 점도 기억에 남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