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민

《오펜하이머》를 보고 왔다.

언덕뵈기 2023. 8. 20. 20:01

2023년 8월 20일

 

0.

현재 상영 중인 영화다 보니 스포일러 주의.

 

1.

엄청난 이슈였던 그 영화 《오펜하이머》. 저마다 믿고 보는 영화감독들이 있을 테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전 국민 단위로 믿고 보는 감독인 것 같다. 제일 유명한 《다크 나이트》에서 끝난 게 아니라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등 연타석을 뻥뻥 날려댔으니.

 

2.

중학생 때 열광했던 《다크 나이트》, 물론 아직도 너무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놀란 감독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자각이 있지는 않다.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고 물으면 다른 이름이 먼저 나오니까. 그런데 뭔가 개봉하면 극장 가서 봐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성인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례로, 《덩케르크》도 극장에서 봤고, 《테넷》도 극장에서 봤다. 이번 《오펜하이머》까지 극장에서 보게 되었구나. 뒤에 이야기할 테지만 내게는 아주 이례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 환경적인 부분이 영향을 줬다고는 생각한다. 내게 기꺼이 볼 의향이 들게 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인데, 보편적으로 인기가 많아서 상영관도 널널하고, 그만큼 같이 보러 갈 사람 구하기도 쉬워지니까.

 

3.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좀 더 영화에 대해서 집중해 보자. 몇 년 전에 놀란의 신작 프로젝트 소식을 들었을 때, 주제만 듣고도 기대가 잔뜩 생기긴 했었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가지는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평전 이름부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크.. 강렬하다. 물론 그 유명한 "로버트는 얼마나 좋았을까"도 있고.

 

4.

나처럼 순수 과학에 발을 들이지 않은 사람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과학자들에 대해선 낭만이 생긴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생각해 보면 한때는 양자역학이란 단어 자체가 힙스터의 그럴듯한 소재(다른 말로 허세)로 쓰이기도 했었지. 영화에서 수많은 과학자 및 역사적 인물들이 나오는데, 초반부터 등장할 때마다 흥분하게 만든다. 와..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페르미, 파인만, 케네디, 트루먼..

 

5.

음향이 압도적이었다. 아무래도 폭발과 관련된 영화였다 보니까. 물론 단순히 음량을 높인다고 이런 느낌을 줄 순 없겠지. 휘몰아칠 때는 휘몰아치다가 중요한 순간에 싹 죽이기도 하고. 주인공 오펜하이머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그 음향으로 구현해 낸 것 같기도 하다.

 

6.

원작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전이었듯이, 전기영화 중에서도 미화보다는 주인공의 입체적인 면을 있는 그대로 부각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 입체성이 모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납득가기도 하는.

 

7.

수많은 인상적인 장면들로 가득 찬 영화였다. 개인적으론 특히 중반 핵폭탄 실험을 성공하고 연설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대사의 리듬감, 화면, 소리 3박자의 완벽한 조화.

 

8.

그리고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 평범한 시간순대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없다. 《덩케르크》때도 느꼈지만 "타임 판타지"적인 요소가 없는 주제에도 이런 식의 편집을 즐겨 사용한다. 영화감독으로서 돋보이는 개성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야.

 

9.

아주 강한 영화였다. 전날 본 영화의 장면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영화. 더 좋고 나쁘고를 뜻하기보단, 의미 그대로 강약에 대한 말이다. 오전에 영화를 보고 나서 오후 내내 머리가 온통 지끈거리더라. 강한 사운드, 화면, 분량. 게다가 자리 경쟁이 꽤 있었던 영화다 보니 그리 좋은 자리를 선택하진 못해서, 제일 앞자리에서 올려다보며 시종일관 등장인물들 얼굴이 꽉 찬 화면에 자막도 뭐 그렇게 큰지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봐야 했다.

 

10.

아무튼 상당히 만족스러웠고, 역시 괜히 기꺼이 극장까지 가서 보게끔 만드는 감독이 아니구나 싶다. 지금도 다른 영화에 비해 쓴 말, 쓰고 싶은 말이 더 많지만 자제하는 느낌이다. 집에서 봤으면 신나서 엄청 써 내렸을 것 같다. 인상 깊은 장면도 엄청 따오고.

 

11.

하지만 사실 영화관에 가서 보는 걸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여가로써 이걸 좋아하는 건데, 영화관을 가는 건 내 템포를 잃는 느낌. 그 환경이 가진 압도적인 장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개인 성향의 문제라서. 극장에서 봐야 하는 최신 개봉작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최근 영화 중 고르자면 나한테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그랬다.) 결국 같이 갈 사람이 안모이면 "혼자서라도 가서 볼만큼 내가 이걸 기대하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들더라. 사실 오늘도 혼자 간 게 아니었고. 물론 삶에 있어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거나, 그걸 모두 다 뛰어넘을 수준으로 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영화라면 혼자 가서 보긴 한다. 그래서 올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조건 혼자서 보러 갈 예정이지 ㅎㅎ.. 근데 그새 국내 개봉명이 바뀌었네. 방금 찾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12.

진짜 아무튼, 훌륭한 영화였다. 여담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이 마침내 킬리언 머피를 주연으로 썼구나 하는 생각도 조금.

 

크리스토퍼 놀란,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