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감상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든 생각

언덕뵈기 2023. 6. 25. 15:44

미야자키 하야오, 2001

 

1.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전에도 몇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중 《붉은 돼지》를 가장 좋아한다. 최애작에 가깝지. 하지만 누구나 다 인정할만한 최고작을 뽑으라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아닐까. 역사적인 작품. 그만큼 오늘은 특별히 포스터 대신 마음에 드는 월페이퍼로 시작해 본다.

 

2.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이 영화를 가장 뒤로 미뤄뒀었다. 그리고 사실 어릴 때에 이미 본 적이 있다. 이미 봤던 두 영화 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 "지브리 투어"를 시작한 초창기에 봤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영화 자체가 지니는 그 무게감 때문인지 자연스레 '가장 마지막에 봐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3.

자연, 아이, 비행, 낭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들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전부 다 나온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이런 단어들보다, 10년 만의 신작으로 예고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제목이 떠오른다.

 

4.

내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1년에 5°씩은 바뀌기 마련이라, 9년 정도 지나 나를 돌아보면 고개를 45° 정도 삐딱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어.

 

아주 오래 전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지금 나는 분명 변해있다. 살도 많이 쪘고.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능력도 조금은 더 나아진 것 같다. 예전엔 좋아했던 것들은 이제와선 손을 놓고 있고. 내가 영화 리뷰 블로그를 만들어서 다 쓰고 있네.

 

5.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하라"는 말을 들으니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변해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예전의 내가 소멸해 버린 것은 아닐 테지.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들이 쌓여 생긴 더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모래시계의 아래쪽에.

 

6.

주제는 주제고, 메시지는 메시지고. 아무튼 영화는 지브리의 이전, 이후 영화들에 비교해 봐도 눈에 띄게 화려했던 것 같다. "백귀야행百鬼夜行" 그 자체였다.

 

7.

감독은 전형적인 서양 풍의 판타지 세계관으로도 유명하지만 일본 특유의 지역색, 국민성, 토착 신앙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사실 제목의 "행방불명"은 일본 원어로 "가미카쿠시神隠し", 아이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 "신이 숨겼다"라고 하는 의미라고 한다. 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긴 하다. 영어 문화권의 특징적인 표현은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대충은 파악이 되는데 다른 언어의 경우에선 이런 디테일을 바로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아 아쉬운 편. 지브리랑 《원피스》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일본어를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8.

보면서 신기했던 점은, 이야기가 조금만 어긋나면 편의주의적이란 이야기가 나왔을 법했을 것 같은데 완벽했었다. 하쿠의 이름이 밝혀지는 장면은 앞서 순간순간 보이던 짧은 컷들이 오버랩되면서 감동이 배가 되었었다.

 

9.

인상 깊었던 장면도 많고, 괜히 그 압도적인 비평을 받던 영화가 아니구나.


인상 깊었던 장면 1

지브리는 항상 음식과 먹방에 진심인 느낌. 애니메이션 계의 하정우 지브리. 그런데 이 장면은 조금 공포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누군가가 자제력을 잃고 폭식한다거나, 폭주하는 모습을 보는 게 무서웠다. 《네모바지 스폰지밥》에서 징징이가 게살버거에 미쳐 날뛰는 편을 보면서도 그런 감정이 들었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 2

가마 할아범. 아주 인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 거미를 연상하게 하는 디자인이 징그러워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신기함이 앞섰고 움직임 자체를 아주 재미있게 그려냈다.

 

인상 깊었던 장면 3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에피소드 하나를 차지했을 법한 장면. 특이하게 장면도 장면인데 소리가 엄청 인상 깊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 4

여기서는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저 두 쬐끄마한 캐릭터가 씬스틸러였다. 아기 모습이었을 땐 그리 정감 가는 생김새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제니바도 반전 같은 모습이 인상 깊었고, 조용히 케이크 썰고 있는 가오나시도 귀여웠고.

 

인상 깊었던 장면 5

하쿠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꽃잎 같은 용의 비늘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그 이야기의 흐름이 순간 눈물이 살짝 날 만큼 아름다웠고, 장면 자체가 너무 이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