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즈 킹덤》을 보고 든 생각
1.
웨스 앤더슨, 두 말할 필요 없는 극단적인 독창성을 가진 감독이다. 사실 이 감독의 영화를 엄청 많이 본 것은 아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프렌치 디스패치》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달리 말하면, 영화를 두 편만 봤는데 앞으로 이 감독의 작품을 무작위로 골라서 보여줘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지는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
그 개성 때문에 연달아 보기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또 잊고 지내다 보면 그 맛이 당기는 날이 오더라. 안 그래도 몇 주 전부터 웨스 앤더슨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다만, 왓챠에 많이 없더라고. 이번에 그래서 웨이브에서 새로 영화를 구매해 봤다. OTT가 다 비슷하긴 한데, 엔딩 부분에서 뜬금없이 버퍼링이 걸려서 아쉬웠다. 우리 집 문제인가 싶은데, 일단 이때까지 내 책상 위에서 영화를 보면서 딱히 버퍼링이 걸렸던 기억은 없다.
3.
즐겨 기용하는 배우가 많은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빌 머레이, 오언 윌슨, 제이슨 슈워츠먼 등등. 물론 영화의 모든 배우를 썼던 배우로 채우진 않고, 다른 유명한 주연급 배우들도 함께 배치시킨다. 이번 영화에서 그 역할을 맡은 배우는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브루스 윌리스. 특히 브루스 윌리스의 모습이 캐스팅 목록을 보는 중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고민하다가 《문라이즈 킹덤》을 선택하게 되었다. 추억의 영화들에서 자주 본 배우인데, 최근 근황이 좀 안타깝기도 하고...
4.
그런고로 일단 배우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감독이 빌 머레이를 특히 자주 기용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아주 사랑스러운 장면들, 움직임들, 연출들에 대비되는 절제된 연기를 가장 잘하는 배우 중 하나. 그럼 이 영화에서 빌 머레이만 그런 연기를 하느냐 하면 또 아니다. 연기 톤이 모두들 잘 통일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 사랑의 도피를 하는 아이들도, 위기를 겪고 있는 중년 부부도 톤이 비슷하다.
5.
그리고 장면들이 참 아기자기했다. 상당히 복잡하고 끊임없이 충돌하는 감각이 느껴진다. 아이가 쓴 듯 한, 하지만 실제로는 어른이 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감독하고 있는 듯이 어른인 척 하지만 아기자기한, 예를 들면 좀 더 군대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보이스카웃이나 아이들이 하는 어른스러운 사랑의 모습들 등. 이런 모습들 때문에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흔히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하는 게 아닐까?
6.
《문라이즈 킹덤》이라는 제목에 대해서는 사실 그 뜻을 잘 모르겠다. 단어 그 자체의 의미 보다는, 둘만의 그 장소에 이름을 붙였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어감 자체는 좋긴 하다. 달이 떠오로는 왕국.
7.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에 넣을 사진은 아니다. 영화 장면을 직접 캡처한게 아니라 스틸컷이기도 하고. 아무튼 어른들 캐릭터 엄청 재밌게 잘 만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또 영화 전체적으로, 엔딩 크레딧에서 특히 노골적이기도 했고, 마치 감독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를 보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감독 사단의 배우들이 존재하고, 그 관현악단이 브루스 윌리스, 레이프 파인즈, 스칼렛 요한슨 같은 솔로이스트들과 협주곡을 연주하는 거지.
8.
이건 그리고 다른 이야기인데, 위에서 《애스터로이드 시티》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이 나서. 사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국내 개봉을 올해에 했었고, 나도 그때 상황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보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집에서 볼 영화의 후보로 등록되어 있는 상태. 요즘 유명 감독들의 훌륭한 작품들조차 극장에서 성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내 모습과도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평론가들도 보장하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국내 극장에서 이례적인 성공을 이끈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었는데 말이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도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건 극장에서 보긴 했지만 아무튼, 이런 영화들의 경쟁작은 같은 시기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들 뿐만 아니라 OTT에 산재되어 있는 수많은 명작들이라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된다. 결국 나는 몇 달 동안 내 리스트에 쌓여 있는 영화들을 소화하느라 바빴고,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 리스트 가장 끝에 추가되어선 차례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으며, 지금은 언제든 1,800원만 내면 영화 사이트에서 구매해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영화 초반부 보이스카웃 묘사가 재밌었는데, 이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누가 봐도 《쇼생크 탈출》의 오마주.
영화의 장면들이 다들 귀엽다고 해야하나. 화자가 귀엽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싫어할 것 같은데 그래도 결국 귀여운 그런 느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두 주인공이 편지로 서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면인데, 1년 동안 쌓였을 편지들의 내용을 목소리가 제거되어 더 우스워 보이는 연기, 그리고 심각한 배경 음악으로 그려내 보여준다.
사랑의 도피 끝에 발각당한 둘. 웨스 앤더슨 특유의 정지된 구도에서 시작해서 빌 머레이가 저렇게 급발진하는 게 왜 이렇게 웃기는지. 사실 그 정지된 구도를 캡처하려다가 이게 더 웃길 것 같았다.
이 남자 주인공 꽤 인상적이었다. 자레드 길만. 아역 배우는 영화 사이트에서 크레딧의 뒤편에 배치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야기의 가장 핵심이 되는 주인공은 이 인물이긴 하니까. 듣기로는 《패터슨》이라는 영화에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카라 헤이워드와 함께 다시 연인 역할로 나온다던데, 그 영화에서의 모습도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