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프럼 어스》를 보고 든 생각
0.
살짝 바쁘다 보니 평소 일요일에 보던 시간에 맞춰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바쁠 줄 알고 일부러 짧은 영화를 골라둬서 늦은 시간에라도 영화를 재생할 순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새벽에 이 글의 스케치를 써내리는 중.
1.
영화를 고르는 게 사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고, 여러 계기를 통해 선택하게 된다. 이번 영화는 몇 년 전에 아주 저명한 영화 리뷰 웹툰 《부기영화》에서 리뷰를 먼저 봤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 웹툰(인터넷에 찾아보니 누가 아카이브를 만들어놨더라)을 다시 봤다. 왜 《부기영화》가 기억나는가 했더니, 줄거리 요약이 아주 강렬하더라. 여담이지만 한땐 텀블벅 통해서 단행본도 사고 그랬는데 요즘엔 안 본 지 꽤 됐다.
2.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저예산 영화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해진 공간에만 인물들이 머물고, 회상 장면 하나 없이 말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화에 직접 참여하는 등장인물들 제외 엑스트라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나온다. 부족해서 아쉬웠다기보단, 한정된 자원을 알뜰살뜰하게 잘 썼다는 느낌.
3.
음악도 돌려막기 하는 느낌이... 진지하게 말하자면, 시작부터 미스터리한 느낌을 전달하는 음악이 꾸준히 배경에 깔린다. 알고 보니 각본가가 아주 유명한 SF 시리즈 《스타트렉》, 《환상특급》의 각본가라고 하더라. 요상한 그 음악의 기원이 느껴지는 부분이 아닌가.
4.
하루종일 머리 쓰고 정신력의 찌꺼기만 남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늦은 밤에 봐서 그런가, 아니면 한정된 공간과 회상씬도 없이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서 그런가. 이거다 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진 않았다. 그래서 이번 주는 아래쪽이 허전할 예정.
5.
숨겨진 미스터리를 파내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미스터리를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구조였다. 새롭다면 새롭다고 할 수 있을 지점.
6.
결국 주인공이 진짜 14000년을 살아온 존재라는 것 보다 중요한 건 그렇게 드러난 미스터리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였던 것 같다. 흥미로운 이야기라며 매료되기도 하고, 신나서 맞장구쳐주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기도. 그 모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야기를 한다는 상황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빅 피쉬》가 생각나긴 하는데, 또 둘이 결말이 아주 다르긴 하다.
7.
예전에 일기에 이런 내용을 썼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어떤 비밀에 대해 밝히는 순간 내가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해 전지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듯한 기분. 사실 나도 그 비밀을 공개하는 순간 남들처럼 과거를 되짚어가고 있던데.
8.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면 왓챠를 통해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기도 하는데, 이렇게 한정된 자원으로 많은 시사점이 담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아브라함 링컨 VS 좀비》같은 영화를 만들고... 뭐 제목만 가지고 뭐라 할 순 없지만 이후 작품들에 대해선 안좋은 평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맨 프럼 어스: 홀로신》이라고 10년 만에 후속작도 만들었는데(같은 배우들까지 데려와서) 평이 안좋다. 아쉽다기보단, 신기했다?